Living in the Bubble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기쁜데,
그림과 글 모두 제가 진행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치 교무실로 불려 가 선생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학생 때처럼, 눅진한 이 말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게 얼마나 어렵던지. 쿵쿵쿵 심장이 얼마나 깊게 울려대던지. 이 말을 내뱉으며 이제 이런 좋은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없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중에 모두 다 떨어진 뒤, ‘첫 투고에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바보같이 그걸 차버리다니!’라고 후회할 것임을 앎에도 이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내 마음은 내 이야기를 내 손으로 만들어내고 싶었기에 이런 후회와 원망은 그저 미래의 나에게 미뤄두기로 했다.
그때,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나의 이러한 결정에도, 좀 더 생각할 시간도 가진 뒤,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주신 것이다. 너무도 뜻밖의 기회에 쿵쿵대던 심장이 이번엔 기쁨과 안도와 설렘으로 조여대기 시작했다. 너무 감사한 제안에 당연히 YES를 외쳤고, 그렇게 생애 첫 출판사 미팅을 진행하게 되었다.
타이밍 좋게도 딱 미국 출국 한 달 전이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출판사와의 첫 미팅을 위해 최대한 점잖은 옷을 입고, 혹시 몰라라는 생각에 내가 그린 거대한 원화가 든 파일을 이고 지고 안양에서 서울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버스 환승을 하고 10분 정도 걸어가기까지 해야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혹시라도 원화가 젖을까, 우산으로 최대한 원화파일을 가리려 하다 보니 몸의 반이 젖어들었고, 추위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길고 험난한 여정은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기쁨으로 전혀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가는 길 내내 꿈이 아니라는 걸 추위를 느끼며, 무거운 원화를 든 손이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비에 흠뻑 젖으며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이런 기회가 오다니! 이런 경험을 해보다니!
늦지 않게 출판사 건물에 도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출판사 문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얼마나 떨리던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문 앞에 서 있던 차, 어떤 직원분이 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 알고 보니 나랑 통화를 했던 담당 직원분이었다. 친절하고 배려 깊은 태도 덕분에 다행히 긴장이 조금씩 풀릴 수 있었다. 오늘 어떤 미팅을 할 것인지, 그리고 담당 직원분 외에 팀장님도 함께 자리하기로 했다는 안내도 해주셨다. 둘이서만 할 줄 알았는데, 팀장님까지 들어오신다니.. 회사 다닐 때 팀장님과 회의했던 게 생각나며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차, 팀장님이 들어오셨고 미팅이 시작되었다. 우선 내 그림책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비하인드를 여쭤보셔서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드렸다. 그런 뒤, 내 그림책을 읽고 어떤 점이 좋았는지, 출판사 측에서 생각한 건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을 해주셨고, 그에 대한 내 의견을 듣는 등의 회의가 한 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현직자를 만난 김에 지망생으로서 그림책을 만들며 정말 궁금했던 것들도 질문할 기회가 있었고, 준비해 갔던 모든 질문을 여쭤보고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회의의 결론은 이러했다. 이 이야기를 내가 그림책으로 내는 것이 맞다고 느껴지며, 그렇게 되기 위해선 내 그림실력 향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림실력은 단기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현실적인 조언도 해주셨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너무도 매력이 있기에 이야기를 좀 더 늘려서 동화책으로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주셨고, 향후 미국에 가서도 동화책을 만들어보는 회의를 계속해서 진행해 보기로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본 이 대면 회의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현직자이자 해당 분야 전문가로부터 질 높은 피드백을 받는 순간이었고,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출판사와 인맥도 쌓을 수 있었으며 그동안 쌓여왔던 궁금증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책이 아닌 동화책이라는 또 다른 길로 향하는 문을 열어볼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나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두꺼운 빙판 아래, 따스한 해의 왜곡된 빛과 폐쇄된 세상 속에 갇혀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 세상이 전부인 양 헤엄치고 살던 것이었다. 이 미팅은 현실과 나를 가로막고 있던, 절대적일 것 같았던 얼음에 거대한 충격을 가해버렸다. 미팅을 하는 내내 쩌저적- 하는 서늘한 소리가 웅장하게 퍼져갔고, 절대 갈라지지 않을 것 같던 빙판에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혀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세상이 갑작스레 무너진 것이다. 그 충격은 눈 깜짝할 새 나의 세상과 현실을 가로막던 거대한 빙판을 깨트렸다. 준비를 하기도 전에 폐가 찢어지도록 시리고 새하얀 공기가 갇혀있던 나의 세상을 쓰나미처럼 휘감았다. 너무나도 아프고 쓰리고 추운 현실에 눈을 떠버렸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받아들여야 했고 나아가야 했다.
나의 세상 속에서 유영하고 있을 땐, 내 그림이 그 정도로 별로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저 개성 있는 그림체라고만 여긴 채 자신만만했는데, 이 미팅으로 내 그림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처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노력을 해야 했다. 감사하게도 동화책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지만, 그림책 작가로의 길은 시작부터 실패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근거로 그리 자신만만했는지.. 회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얼마나 씁쓸하고 부끄러웠던지..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점점 한 달 뒤 시작될 미국에서의 삶이 더욱 두려워졌다. 그곳에서 나 혼자 어떻게 그림을 공부해야 할지.. 그림책을 만들 수는 있을지.. 압도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모르는지, 출국일은 점점 다가왔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그림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