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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콜 7시간전

50분의 1

A Moment of Divergence

 '다음 기회에..', '다음 번에..'. '아쉽지만..'의 회신과 수많은 무응답이 쌓인채 한 달 반이 지났다. 

이젠 거의 포기상태였다. 나의 오만함에 반성도 많이했다. 한 번에 되리라 생각했다니.. 참으로 오만했었다. 취준 이후 처음 겪은 무자비한 참패에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니, 분명 그리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수 많은 구두굽에 짓밟힌 진흙 속에서도 나의 푸르름은 짓이겨 지지도, 색이 바래지도 않았다. 이럴수도 있다니. 꿈이 있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창피함에, 부끄러움에, 좌절감에 시들기보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꿋꿋히 나아가려는 의지가 더욱 푸르게 빛나는 것이었다. 반성할 건 반성하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고, 다시 앞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맀다.


 당연히 서운함과 아쉬움, 불안함, 그리고 초조함은 존재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직업'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분명했다. 예상치도 못한 '백수'로서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될지도 모른 채, 미지의 세상으로 던져지는 것도 두려웠다. 그래도 그리 무서워하고 불안해하기보단, 그 동안 노력해 쌓아온 내 경험에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두렵고 불안해봤자 나만 힘들지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긍정적으로 내가 얻은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보니 꽤나 괜찮은 배움과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의 더미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봤지 않는가! (출판이 되었다면 너무 좋았겠지만,) 원래부터 처음의 의도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보는 것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캐릭터도 만들어보고, 스토리도 짜보고, 스토리보드도 만들어보고, 원화도 그려보고, 과슈도 써보고, 포토샵도 어설프지만 써봤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그림책을 읽어보고, 강의도 찾아 보며 지식을 쌓으며 처음보다는 많은 정보를 얻게 되기도 했다. 또, 그림책이 완성됐을 당시, 마침 볼로냐 그림책 공모전 마감일이 맞닿아 있었고, 선생님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공모전에 참가도 해봤다. 마지막으로 출판사를 찾고 출판사별 그림책을 분석해보기도 했고, 직접 50개 이상의 출판사에 메일을 넣어보기도 했다. 몇 달 간의 과정을 통해 그림책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출판제의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공모전에는 이렇게 제출하면 되는구나 등 큼직한 줄기는 다 경험해 본 것이다. 그래도 역시나,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 켠은 눅눅하고 묵직해졌다. 출판 경험이라도 쌓아보고 미국으로 출국했으면..하는 소망이 있었는데..이뤄지지 못할 것이니까.


 미국 출국 한 달 전. 그 날 저녁도 다른 날처럼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밥을 앉히고 찌개를 끓이고 있던 그 때, 남편이 퇴근을 했다. 출국 한 달 전쯤이었어서 회사에서 출국 관련 공지가 쏟아지던 차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게 남았는지 이야기할 것이 산더미였다. 함께 저녁 준비를 하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안방에 있던 내 전화가 울렸다. 평소에 스팸 전화말고는 전화가 거의 오지 않아 이번에도 또 스팸 전화이겠거니 싶었다. 고기를 굽고 있던 나는 남편에게 대신 끊어달라고 부탁했고, 남편은 발신자를 확인하러 안방으로 향했다. '아니, 요새 스팸전화 너무 자주 오는거 아니야? 번호 바꿔야하나..' 생각하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를 끊고 바로 나올 줄 알았던 남편이 방에서 나오질 않는 것이다.



투다다닥-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내 전화를 든 채 방에서 달려나오는 남편. 초롱초롱한 남편의 눈과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전화를 건내주는 것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누구의 전화이길래 저런 표정으로 나에게 전화를 넘기는 걸까 수많은 후보가 순식간에 머리속에 스쳐갔다. 그러나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고, 재차 '누군데'라고 물었지만 남편은 웃기만 한 채 전화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남편이 스팸전화로 장난치는건가 의심했다. 장난에 속고 싶지 않아 바로 넘겨받지 않은 채, '왜' '누군데'라는 말만 뻐끔거리다 결국 남편에게 하던 요리를 토스하고 전화를 넘겨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00출판사입니다. 혹시 000 작가님 맞으신가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울려오는 목소리,

"00 작가님 맞으시죠..? 00 작품 메일로 보내주신 거 읽어봤어요."


.

.

.

...


치이이익-!!!!!!!!!!!!!!!!


...?

...?!!

....!!!!

"아..네. 저 맞아요."


 밥솥에서 증기가 배출되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려 답을 했다. 동시에 심장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설렘과 안도가 밀려왔다. 메일로 답이 올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전화가 바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 겪는 상상도 못한 이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럽고 신기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가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고, 예상도 못한 제의가 들어왔다.



"음.. 저희가 검토해보고 제안드리고 싶은 점이 있어서요. 

혹시...이 책을 글작가로 출판해보시면 어떨까요? 그림 작가분은 따로 두고요."


 전혀 생각도 못한 제의였다. 그리고 설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제안이었다. 메일이었다면 고민 할 시간이라도 있었을텐데, 통화로 이런 제안을 받으니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예측도 못했던 제안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스쳐갔다. '이렇게라도 기회를 잡은 게 어디야, 이것도 좋은 경험일거야. 이런 기회도 감사하게 여겨야해!'라는 생각과 '내 첫 그림책은 내 머리 속에서 나온 이미지로 채우고 싶어. 내가 만든 세상은 내가 그려내고 싶어'라는 생각이었다. 감사함으로 이렇게라도 찾아온 기회를 받아들일지, 욕심으로 이 기회마저 날려버릴지였다. 


아.. 메일로 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꿈같은 기회였다.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기회였고, 내 이야기가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는 찜찜함과 답답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그림책에 대한 애착이 꽤나 강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 그림책은 그 당시 정말 힘들었던 내 상황과 고민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풀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이야기'였다. 내가 가장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나이기 때문에), 내가 머리 속에서만 벌어지던 상상 속 이미지였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타인이 그려낸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잠시 말 없이 고민을 한 뒤, 결정을 내렸고 내 결정을 전달 드렸다.



만약 내가 이때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아직까지도 종종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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