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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콜 Nov 12. 2024

내 생에 가장 큰 지각변동

Start from Scratch

  그때의 난 가려했던 길, 하고 싶어진 일, 그리고 해내야 하는 책임 사이에 놓여있었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체력적 한계가 올 수록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 왔지만, 여태껏 이 악물고 버텨냈던 과거의 나에게 미안함이 생겨 그 마음을 누르려 노력했다. 하지만 회사 일로 자존감이 낮아지는 현상이 생기면서부터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예전부터의 일들이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이면서 전에 없던 트라우마도 생겼고, 자존감도 지독히 낮아져 있었다. 매번 회사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금세 바꿔 쓸 수 있는 부품같이 쓰이는 존재 같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다시 우울감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속히 말하는 현타가 세게 오자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랐는지 몸 구석구석 하나둘씩 아프기 시작했다. 점점 이 일이 나와 맞는 걸까, 이 길로 가는 것이 맞을까라는 본질적 의문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재밌게도 이런 타이밍에 나는 꿈이 생겼고, 꿈에 대한 열정과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자아는 절벽 끝으로 내몰린 것 같은 상황인데, 또 다른 자아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겨 행복감에 젖어있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퇴사'라는 결정에 신중해지려 했다. 그 결정에 도망, 회피, 합리화라는 단어가 진하게 섞여있을까 봐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망쳐도 되었고, 잠시 회피하며 쉬어도 되었고, 합리화를 해도 되었는데. 그렇다고 인생이 망하거나 무너져 내리지 않는데. 과거의 나에겐 그런 약한 내 모습은 용납되지 않았었다. 내 힘듦은 뒤로한 채,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계산이 더 중요했었다. 철없는 생각 때문에 모든 걸 물리기엔 책임감이 너무도 강했다. 퇴사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버텨낸 것들을 놓아버린다는 것이기에, 나에겐 의미가 컸었다. 객관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결론을 도출해 가는 과정까지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오랜 기간 조언을 구했다. 바로 남편과 동생이었다. 


  남편은 나와 달리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고 싶은 일이 뚜렷했고, 그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쭉 파고들어 지금까지 성장해 온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일이어서일까, 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금세 털고 한 걸음 담담히 나아갔다. 나 또한 넘어지더라도 일어서는 힘은 가지고 있었지만, 남편의 다시 일어서고 나아가는 그 힘은 내가 가진 것과는 매우 달랐다. 더욱 생기가 있었고, 영롱한 특유의 빛을 내고 있었다. 의무감과 책임감이 밑색으로 깔린 나의 것과는 달리 호기심, 도전하고 성장하는 재미, 지식의 빈 곳을 채워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더욱 짙게 물들여진 어여쁜 빛이었다. 그 아름다운 힘을 지닌 남편은 늘 빛나 보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저런 빛이 나는구나를 남편을 보며 느꼈고, 언젠가부터 나 또한 남편처럼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빛이 나고 싶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림책이라는 꿈이 나에겐 그런 삶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회로 느껴졌다. 분명 중간중간 길이 새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이 직업이 주는 가치와 의미가 내게는 너무나도 지대했다. 처음 내게 다가와준 설레는 이 마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나도 이 일을 통해 남편처럼 어여쁜 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남편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생각보다 즐겁지만은 않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다는 건 취미가 사라진 것과 같다고. 일은 결국 일이라고. 미래의 내가 받을 상처와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어 했다.


  동생 또한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공부를 쭉 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나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동생은 뼈 때리는 말을 많이 해주고는 한다. 극 F인 나는 동생의 T적인 말에 대부분 상처를 받고 생각 정리를 시작하곤 했었는데, 이번엔 그의 그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가 축축하게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나의 걱정과 두려움을 한 방에 증발시켜 주었다. 

"누나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뭔데? 그림책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럼 다시 취업하고 천천히 다시 도전해 보면 되지 않아? 

최악이라고 해봤자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재취업인 것 같은데?"

  정신이 번쩍 들며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아직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여 현실을 소모하던 내게 동생이 가벼운 정리를 내려준 것이다. 늘 해낼 가능성이 있는 범주 내에서의 도전을 했던 나였다. 처음 0부터 새로 시작하는 도전을 앞둔 나에게 실패는 너무나도 무서운 존재였다. 실패를 한 나 자신을 낙오자, 실패자, 패배자로만 받아들일 것이 두려워 주춤대던 내게 동생이 실패해도 뭐 어때라는 말을 툭 던져준 것이다. 실로 큰 영향이 있는 말이었다. 그 조언을 토대로 나는 내 도전에 6개월이란 기간을 두기로 결심했고, 그 기한 내에 결과물이 없다면 재취업을 해야겠다는 플랜을 세웠다. 재취업을 한 뒤, 꾸준히 도전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플랜을 세우고 나니 새로운 도전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막막함과 두려움보다는 설레고 재밌기만 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간 치열히 고민했던 선택에 대한 답을 내렸다. 퇴사를 결심했다.


  처음으로 퇴직금도 받아보고, 좋은 직장 동료를 만나봤던 의미 깊은 회사를 그만두려니 아쉬움도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지나면 힘들었던 추억은 미화된다 하지 않던가. 퇴사라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괴롭던 출근길이 아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얼마나 우습던지. 다행인 건, 미련이 없는 후련함이 내 결론 끝에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이 옳다는 확신을 주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 찐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퇴사라는 단어를 드디어 끄집어냈다. 바쁘게 인수인계를 하던 한 달 동안, 지금껏 내 삶의 가장 큰 변화를 잘 마무리했다는 후련함에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회사를 나온 뒤엔 우선 건강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잠도 푹 자고, 잘 먹고, 글을 쓰며 스트레스를 배출시키려 노력했다. 다행히 건강은 차차 좋아졌고, 고민하고 있던 그림책 작업에 더욱 집중하며 하루를 살아갔다. 


  퇴사 후, 기분 좋게 변화한 새로운 내 삶에 적응하며 루틴을 만든 지 2주가 되었을까.. 한참 방에서 그림책 원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에게서 다급한 문자가 왔다. 띠롱띠롱 계속해서 울리는 문자 소리에 하던 작업을 멈추고 남편의 연락을 받았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내 삶의 변화가 그저 폭풍전야였을 뿐이었단 것을 알려주는 문자였다.


"자기야, 우리 올해 안에 미국으로 떠나나 봐..?"





".. 뭐..?"


내 생에 가장 큰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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