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y
꽤나 더운 여름날, 그림책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주말 아침마다 안양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을 했다. 취준생활 이후로 이른 오전의 강남을 거니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할 때 오전의 강남을 걷게 되는 것 같았다. 첫 수업 날, 선생님은 참고해 보라며 여러 종류의 그림책을 꺼내 보여주셨다. 국내 그림책부터 해외 그림책까지. 그림책이란 걸 정말 오랜만에 펼쳐봐서 기분이 묘했다. 사실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주 아주 어릴 적, 공룡 가족에 관한 그림책을 읽었던 기억이 그림책에 관한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였다. 처음엔 마냥 유치하고 어린이들의 이야기라 생각하며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이 읽는 책이니 유치하고 쉬운 내용일 수밖에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마지막 장을 닫을 때 깨달았다. 특히 사를로트 문드리크/올리비에 탈레크 작가의 <무릎딱지>라는 그림책은 첫 문장부터 신선한 충격이었다. 성인도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이라는 단어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도,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주제를 사용했다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놀라웠다. 그림책을 한 권, 두 권 읽어갈수록 그림책의 세계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이 있고, 문학적이고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성인들이 읽어야 하는 심오하고 깊은 메시지도 많았다. 심지어 어떤 그림책은 읽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텍스트와 그림의 상호작용, 하나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짧지만 강한 스토리, 어여쁜 그림과 통통 튀는 글까지. 그림책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속수무책으로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점점 남편이 왜 내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말을 막 시작한 아기일 때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했다. 라이언킹 애니메이션을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하루에 3번씩 봐야만 잠을 잤다고 엄마가 늘 이야기하셨다. 그 영향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나의 꿈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예체능 쪽으로 가지 않으면서 그 꿈은 사라져 버렸지만, 아주 오랜 기간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다. 대학을 가고, 일을 하면서도 아주 가끔 그 꿈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림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싸움이 내 안에서 벌어졌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 창작 쪽으로 진로를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모두 거절당해 상처받고 자취를 감췄던 그 자아가 그림책을 시작하고 만들기 시작하면서 눈을 떠 버린 것이다. 십 년 넘게 눈을 감고 자취를 감추었던, 그래서 십 년 넘게 눌려 지냈던 그 자아는 눈을 뜨자마자 어마어마한 고집을 부려댔다. 여태껏 내가 양보했으니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고집에 현실적인 자아는 이 아이가 왜 이리 떼를 쓰는지 생각정리를 정말 많이 해야만 했다. 아니, 그림책과 디즈니는 다른 매체이고 다른 결인데 왜 갑자기 그림책을 이리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금처럼 삶이 안정적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 당시에 관련해서 일기를 정말 많이 썼던 것 같다. 내면의 내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다 보니, 이 아이의 고집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디즈니와 그림책의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바로, ‘창작’을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아주 비슷했다. 되돌아보니 정말로 그림책을 만들면서 내가 즐거움과 설렘을 느꼈던 포인트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직접 이야기를 창작할 때, 캐릭터를 생각할 때, 어떻게 그 이야기를 전개할지, 또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할 때였다. 정말 그럴 때마다 순수하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짧았던 두 달간의 기초반이 끝이 났다. 기초반에서 만들고 있던 그림책 더미는 완성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터라 고민 없이 심화반 수업을 바로 신청을 했다. 그때쯤, 코로나에 대한 대응책이 쏟아지고, 재택도 풀려 슬슬 회사로 출퇴근을 다시 시작할 때였다. 그 덕에 회사와 그림책 만들기를 매일 병행해야만 했다. 퇴근 후, 한 시간이라도 짬을 내어 더미를 완성시키기 위해 책상에 앉아있곤 했다. 여태 ‘필요에 의한 무언가’를 해내며 살아온 성취형 인간에게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다는 건 피곤함도, 게으름도 적수가 되질 못했다. 그림책을 만들며, 그림책을 공부하며 점점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확고해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과 부합한다는 것도, 적성에 맞는 것도 다 모두 확신에 중요한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그 확고함에 못을 박은건 그림책 작가로의 발자취였다. ‘기록’을 중요히 여기던 나에게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들을 기록하여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요소였다. 30대 초반의 내 생각과 감정, 30대 후반의 내 생각과 감정, 40대, 50대… 내가 그만둘 때까지, 그 과정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져 보였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졌다. 또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기억 한 줌이라도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반면 운명의 장난인 것인지.. 행복만 더해지는 내 취미생활과 달리 직장생활은 점점 힘들어져만 갔다. 그림책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림책을 만난 뒤 팀이 바뀌고 일도 달라졌다. 일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여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 스트레스 때문인지 건강이 안 좋아져 아침마다 구토를 했고, 소화불량과 어지럼증이 생기는 날도 잦아졌다. 전에 없던 기립성 저혈압이 툭툭 튀어나와 출퇴근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쓰러질 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보곤 했지만 별 이상은 없다는 결과만 반복될 뿐이었다. 초. 중학생 이후로 처음으로 꿈이 생겨 행복감에 젖은 자아와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자아가 매일 부딪히다 보니 자연스레 퇴사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퇴사를 했을 시, 현실적인 대비책과 대안이 준비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무작정 퇴사를 한다는 것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는 성인인 나에겐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니치한 직무였기에 이직할 수 있는 회사의 선택지도 매우 좁았고,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만으로는 나를 받아줄 것 같은 회사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버텨서 조금 더 쌓아간 뒤 이직을 하거나, 아예 비슷한 분야이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이직을 하거나.. 그 두 가지의 선택지뿐이었다. 나아가고 싶은 길이 있어 택한 커리어였기에, 그 커리어를 위해 쌓아가는 길 중간에서 하차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껏 이 커리어를 위해 독하게 버티고 버텼던 나날들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분야로 확장시키기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분야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결정을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특히나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퇴사를 한다는 게 남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커 퇴사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업과 부업의 개념으로 일과 그림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책을 본업으로 생각하며 퇴사를 한다는 건, 이제 겨우 대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가진 이 시점에 다시 초등학교를 들어가라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말과 같았다. Phase 4에 다다랐는데 Phase 1부터 다시 하라는 말과 같았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플랜은 시작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나에게 그림책을 본업으로 가져간다는 생각은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선택지였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몇 달 동안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책 만드는 것에 대한 애정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