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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콜 Nov 19. 2024

무식하면 용감하다!

No Way Out

 정말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통보에 머리가 하얘졌다. 말 그대로 머리가 하얘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아니.. 미국이라니?! 너무 황당하고 어이도 없고 당황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심지어 11월 출국 예정이라니.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이 컸었다. 고등학교 시절, 책상 앞과 스터디 플래너 앞면에 늘 여러 가지 긍정확언과 꿈에 대한 문구가 포스트잇에 적혀 붙어있었다. 3년의 긴 시간 동안 그 공간에는 수많은 말들이 채워지고 지워지곤 했는데,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잡초처럼 꿋꿋이 살아남았던 두 가지 문구가 있었다. 바로  ‘스무 살이 넘으면 유럽 배낭여행 가기’와 ‘해외에서 살아보기’였다. 이 꿈을 바라며 힘든 고등학교 시절을 버티고 버텨냈고, 대학교 2학년 때 모아둔 적금을 털어 6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18kg에 달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친구와 유럽 이곳저곳을 종이 지도에 의지한 채 여행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하고 좋았어서, 분명 해외살이도 그러할 것이라 기대했다. 두 번째 꿈인 해외살이를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해외 인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고, 대학교 3학년 말쯤 미국 동부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감과 행복감에 부풀어 향했던 나의 첫 해외살이는 불행히도 상처와 실망이 가득한 채로 막을 내렸었다. 해외를 ‘여행’한다는 것과 ‘산다’는 개념의 차이를 처절하게 느낀 채로 말이다.


 그때의 고생과 외로움, 서러움 등을 알고 있기에 남편의 미국으로의 해외 파견이 마냥 즐겁고 재밌게 느껴지진 않았다. 솔직히 그걸 다시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긴장감이 더 맴돌았다. 심지어 그림책을 도전하다 잘 풀리지 않으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이란 마지막 보루를 염두한 채 퇴사를 한 것이기에.. 마지막 보루까지 없어진 이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러라고 퇴사한 건가..?’ 싶을 정도로 퇴사한 지 2주 만에 이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어차피 퇴사를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몇 달간 퇴사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했다는 게 허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동시에 새로운 도전이 벼랑 끝에서 시작하는 기분에 엄청난 초조함, 절망감, 그리고 압도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것이다. 그림에 ‘그’도 모르는데, 그림책도 이제 걸음마를 떼었는데.. 나 홀로 어떻게 해내야 하는 것인지.. 한국에서도 어디서, 어떻게 관련된 정보를 얻는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전이 성공하지 못할수록 공백기만 길어질 테고, 이직의 가능성은 낮아질 텐데…. 부정적 알고리즘이 작동되며 온 세상이 내가 실패하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 홀로 미국으로 가서 떨어진 채로 생활하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아무리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 같아 무서워도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소중했다. 우리는 이미 내가 미국에서 인턴생활을 할 때 장거리 연애를 경험해 봤었고, 장거리 연애와 우리는 맞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의 꿈은 분명 힘들고 고독하고 어려울 것이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힘든 시기를 홀로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나에게 ‘무엇이든, 함께’라는 것을 가르쳐준 남편 곁에서 그 과정 또한 함께하고 싶었다. 힘들 때도 함께, 기쁠 때도 함께. 결국 선택지는 함께 떠나는 것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궁지에 몰린 내 자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투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해 볼 수 있을 만큼 해보자라는 열정과 나를 이렇게 내몬 운명에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3개월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발령 통보와 동시에 미국으로 갈 준비를 시작해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촉박하고 초조하게 흘러갔다. 남은 3개월 동안 나의 최우선 순위는 그림책이었다. 첫 발걸음을 떼자마자 브레이크 댄스를 춰야 하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대학교 전공시험을 쳐야 하는, 이제 물에 뜨기 시작했는데 바다를 건너야 하는 그런 상황과 다를 것 없이 느껴졌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선생님과 진지하게 의논을 했고 동일한 결론에 다다랐다. 한 번 경험을 해본 것과, 한 번도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은 천지 차이임을 알기에, 떠나기 전까지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진도를 빼보기로 한 것이다. 미국에서 혼자서 도전을 할 때에 그나마 해봤다는 경험치가 있으면 훨씬 다를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진도를 빼기 위해 야무지게 아주 높은 목표를 세웠고, 그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향해 불도저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의 이상적인 목표는 3개월 내에 작업 중이던 그림책 더미를 완성하여 출판사에 투고한 뒤 출판계약을 따고 미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처음 만져보는 과슈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매일 책상에 앉아 5-6시간 넘게 그림 원화를 그려나갔다. 우리나라 그림책 레퍼런스를 최대한 머리에 담아놓고 싶어 틈틈이 서점과 도서관에 가 그림책을 읽고 오곤 했다. 그 사이 코로나로 인한 비자 인터뷰가 계속 밀리며 11월이었던 출국 일정은 계속 미뤄졌고, 언제 출국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리 작별 인사를 했던 친척들과 친구들과도 그 이후 두세 번을 더 보았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너 언제 나가?’ ‘나(저)도 몰라(요)’라는 대화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오히려 내게는 그림책에 대한 경험을 쌓을 시간이 더 늘어간 것이기에 이 상황이 반갑기도 했다.


 10월 말, 4월부터 만들었던 첫 더미북이 드디어 완성됐다. 지금 다시 그 더미를 펼쳐보면 부끄럽고 창피할 정도로 그림이 별로인데, 그때엔 그 더미가 완성도 높고 세련되게 보이기만 했었다. 개성 있는 그림으로밖에 안 보였으니.. 스토리도 마음에 들겠다, 투고를 하면 그래도 몇 군데에서 연락은 오겠지라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었다.

 

 완성된 더미북을 마무리하여 선생님이 알려주신 방법대로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작성했다. 50통이 넘는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고, 남은 건 기다림 뿐이었다. 그때쯤 출국 날짜가 드디어 확정이 되었고, 본격적인 출국준비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집도, 차도, 신혼가전도 모두 2년도 못 쓴 채 처리해야만 했고, 친구들, 친척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점점 벼랑 끝이 가까워 오는 기분이었다. 비상을 할지, 추락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절벽 끝에서 뛰어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강제적인 백수의 삶이, 안전장치 하나 없는 무방비한 도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백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백수’가 된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시기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매일 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일을 갖게 해달라고, 그림책 작가의 직업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투고 후 하루에 수십 번씩 메일함을 들락거리며 회신을 기다렸다.


 투고 후 한두 달 동안 수십 개의 출판사 중, 대부분은 회신이 오지 않았고, 몇몇 출판사는 회신을 주었다. 취준 때보다 더 많이 불합격 통보를 받아본 것 같다. 그때만큼 내 생을 부정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말이다. 내 생에 이리도 많은 부정과 거절을 겪어본 적이 처음이라,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내 자존감과 자신감은 진작에 바닥을 찍었고 이미 저 깊은 지하 속으로 파묻혀가고 있었다. 불합격과 무대응의 나날이 쌓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싶은 마음도 커져갔다. 어떻게 고치고 수정하면 되는지 알면 수정할 수 있을 텐데… 피드백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이고 답답한 것이구나.. 느꼈다. 그제야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에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가 얼마나 오만하고 무식했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창피하다. 그리도 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니.. 그러나 무식했기에 그렇게도 용감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무식해서 부딪힐 수 있는 시기는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무식이 유식이 되는 과정이다. 무언가에 관심이 생겼고 그것에만 온 마음과 에너지를 다해 깊이 파고들겠다는 것이며,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내가 도전하는 것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 말은, 무식하게 용감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 첫 시작 때뿐이었다. 그래서 무식했지만 용감했던 나의 첫 도전이 많이 과감할수록 얻는 것도 몇 배나 많은 것 같다. 그때의 경험만큼 생소하고, 날 것인 경험은 다신 없을 테니까. 그 경험만큼 내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건 첫 유럽 배낭여행이 내게 준 가르침이기도 했다. 무식하게 출국과 입국일 비행기 표만 끊어놓고, 첫 입국지인 로마에서의 숙소 하나만 예약해 둔 채 어느 나라로 갈지, 어느 도시로 갈지에 대한 계획 하나 없이 우당탕탕 떠났던 첫 배낭여행. 인터넷 로밍이 비싸서 종이 지도 한 장만 들고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길을 찾았었고, 이상한 기차역에 내려 6시간을 고립되기도 하며 보냈었던 하루하루가 평생토록 빛나는 기억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무식하게 용감했던 나의 첫 도전도 나에게 평생 가는 찬란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원한 자산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도전적으로 밀어붙였고, 처절히 실패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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