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초의 시간

by 기한없는 통조림

몽빠르나스에서 파리의 야경을 볼 때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었다.


10년 전 쯤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내겐 작은형부한테 빼앗다시피한 니콘 401F 수동카메라가 있었다. 단지 들고 있으면 폼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작동법도 모른 채 수동카메라로 자동 카메라 찍 듯 사진을 찍었었다. 낮에 찍은 사진은 그럭저럭 잘 나오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밤에 찾아왔다.


처음으로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랐을 때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뉴욕의 야경을 보고 미친듯이 셔트를 눌러대 30분 만에 필름 두 통을 모두 써 버렸고, 다음 날 잔뜩 기대를 하고 1hour 현상소에서 멋진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길 기다렸으나 몇 분 뒤 손에 쥐어진 건 못쓰게 돼 버린 필름 두 통 뿐. 단 한장도 인화되지 않았다.


노출과 셔터스피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나는 좋은 카메라니까 셔터만 누르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 상황이 창피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던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옆 반 친구 구스타보였다. 말도 한 번 해보지 못한 그 친구는 그 때 당시 최고의 명기였던 캐논 EOS5 를 늘 메고 다녔다. 얼핏봐도 사진 고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구스타보에게 야경찍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을 꺼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OK'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 수업이 끝나고 우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라갔다.


다른 서양 아이들 답지 않게 무뚝뚝하고 과묵한 구스타보는 내가 몽빠르나스 타워에서 그랬던 것 처럼 말 없이 뉴욕에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 별들이 반짝이기를 기다렸다.


처음 그 날 처럼 다시 눈 앞에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졌을 때, 구스타보는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한 뒤 노출을 조이고 느린 셔터스피드로 야경찍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을 때 셔터를 누르기 전에 3초간 눈을 감고 숨을 멈춰 봐. 그 다음에 셔터를 눌러도 늦지 않아."


라고 말하며 눈을 감고 숨을 멈춘 뒤 3초 뒤에 셔터를 눌렀다.


3초간의 정적과 유난히 긴 속눈썹을 가진 구스타보의 감은 눈이 가늘게 떨리던 그 순간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게 어떤 야경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 같았고 그가 사진을 찍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린 단짝이 되었고 일본 친구 한 명과 셋이 늘 붙어 다녔다. 정말 좋은 친구로...


구스타보는 아버지 때문에 법대를 다니고 있지만 뉴욕 ICP 에서 전시하게 될 날을 고대하며, 나름의 프로젝트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는데 뉴욕에선 지하철 METRO 의 풍경을 찍고 있었다. 징하게 구두쇠였던 녀석은 뉴욕에서 찍은 사진들은 현상료가 비싸다는 이유 때문에 단 한통도 현상하지 않고 필름 그대로 가방에 모아 놓고 있었는데 떠날 즈음엔 백통도 훨씬 넘어 보였다.


어느 날 그런 짠돌이 구스타보가 그의 집 근처 아르헨티나 레스토랑으로 나를 초대해 맛있는 고기를 실컷 사주고 집으로 데려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던 몇 가지 프로젝트 사진들도 보여 주면서 - 사진을 모르던 그 때 내가 느끼기에도 그의 작업들은 정말이지 굉장했다 -

한참을 들 떠 신나게 떠들어 댔다. 그리고 집에 갈 때 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며칠 뒤에 작별해야 함을 알렸다. 아르헨티나에 오면 자기 집 옆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재워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꼭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정말 아쉬웠지만 어학연수로 만난 각국의 친구들은 어차피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언젠가 뉴욕 ICP 에서 멋진 사진으로 데뷔할 날을 진심으로 고대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그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가 떠난 뒤 한 달 뒤 쯤 일본친구를 통해 구스타보가 내게 고백하기 위해 귀국을 두 달이나 연기하며 속앓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국에 남자친구가 있었던 나는 뉴욕의 친구들과 그 달콤쌉싸름한 장거리 연애에 대해 자주 수다를 떨었었다. 구스타보는 사진 찍을 때 처럼 순간을 기다리기만 하다 결국 셔터를 누르지는 못한 것이다.


구스타보에게 야경 찍는 법을 배운 그 날 이후로 내게도 중요한 순간에 눈을 감고 숨을 멈추는 3초간의 의식이 생겼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그 때 부터였던 것 같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와 비슷한 몽빠르나스 타워에서 그 날을 떠올리며 3초를 기다렸다. 내가 이제 혼자서도 원하는 야경을 필름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익살스럽게 휘파람을 불면서 기뻐할 구스타보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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