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타는지성인 May 15. 2020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당신은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를 본 적이 있는가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어땠는가

전형적인 신파 공식을 따른 영화였나, 아니면 괜찮은 영화라서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인가. 지루하고 말도 안 되는 영화라서 외면하고 싶은 영화였나. 아니면 최소한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나. 여기서 나온 모든 말들을 쓸 수 있는 영화, 즉 괜찮은 신파 영화로 추천한다. 지루하고 말도 안 되지만 최소한의 울림을 전할 수 있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잠깐 소개하고 싶다.


영화에서 전지현은 신파를 위해선 흥미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하는 다큐 PD이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겠지만 그녀에게도 한계점이 온다. 그 한계점은 아마 퇴사 충동일 것이다. 어떤 영화라도 이런 위기에 놓였을 때 어떤 특별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평범하지 않고 스스로를 슈퍼맨이라고 말하는 황정민의 등장과 전지현의 만남이다. 황정민은 특별한 힘으로 사람들을 도와준다. 정상인의 시선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 도와줄 뿐이다. 전지현은 이를 아주 잘 알고 그를 이용할 수 있는 PD였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세상은 상대방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불쾌감이나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지 않는 그렇게 타인들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상식선에서 허용되는 범위로 타협을 하였다. 아무튼 피해 주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는 피해도 주지 않지만 도움을 주지도 않지만, 가끔 타인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를 받은 사람을 도울 방법은 쉽지 않다. 아니면 방법을 잊어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또한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신에게도 처할 위기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신이 슈퍼맨이라는 생각을 가진 비정상인이다. 그래서 그의 힘으로 사람들을 돕는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안다. 비정상인이 돕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황정민처럼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람들을 돕는 게 정상일까.


어렸을 때 생각했던 슈퍼맨은 가슴에 S와 근육, 그리고 휘날리는 망토가 있었다. 망토를 두르면 힘이라도 나듯 한쪽 손을 접고 다른 한 손은 위로 활짝 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점프!

누가 높은 곳에서 뛰는 경쟁이라도 할 때면, 나의 용기와 또래 아이들과의 경쟁심에서 뒤처질 수 없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망토는 빨간색이면 더욱 좋다. 더 중요한 것은 초능력이다. 어떤 위험한 상대더라도 눈에서 레이저가 나와서 악을 제압하는 것! 그러니까 내편 아니면 그날의 그 순간에는 모두 적이었다.

그런 능력은 상상으로 가능했다. 입으로 낸 효과음이라던지, 어느 날 새로 생긴 아이템을 가지던 날이라던지.

황정민은 슈퍼맨이라서 이 모든 게 가능하다. 언젠가 크립토나이트가 몸속에서 나오면 하늘을 날 수 있고, 초능력을 쓸 수 있다. 이런 상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잊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기 위해 남을 도왔다. 남을 돕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팍팍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주 가끔씩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황정민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웃음 속에서 슬픔이 묻어나는 과정, 왜 그가 슈퍼맨으로 살게 되었는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 알려주는 과정에서 어쩐지 그가 이해가 된다.


“내가 이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거기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미래가 바뀐 거지. 

남을 돕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것.”


돈키호테 알론조가 그랬다. 자신은 오랜 세월 공주를 지키는 라만차의 기사다. 세상은 다들 그를 미쳤다고 한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가 알던 사람들과 평범히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키호테 알론조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만남으로써, 삶에서 최소한 몇 가지의 의미가 더해졌고,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수 가지의 의미가 더해졌다. 돈키호테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알론조가 자신이 누군지 기억 못 하는 장면이었다.

라만차의 기사는 험난한 여정을 거친 것과 수많은 여행을 잊었고, 자신이 섬겼던 공주 둘시네아의 존재도 잊는 순간이 내게 가장 비극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영화의 힘 <봉준호X박찬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