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값어치를 굳이 환산하자면 다이아몬드 쪽이면 좋겠다. 다이아몬드는 가진 적이 없지만 언젠가는 가져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내 손에 쥐어진다면 불행해질 것 이다. 어렵고 힘들게 손에 쥘게 뻔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다이아몬드는 그냥 내 마음을 표현하는 걸로만 하자.
현재 내 마음의 값어치는 보석 반지 정도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다. 보석반지는 모양은 보석이지만 쉬운 유혹을 가졌다. 단 맛을 가진 사탕이기도 하고, 유통기한이 어느 정도 존재해서 부패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닮았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쉽게 변하고 쉽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보석반지는 어렸을 때 자주 먹던 반지 모양의 사탕이었다. 손가락에 끼우고 먹던 모습을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시간은 늘 빠르고, 뭔가 빨리 없어지는 것 같은 불변의 진리를 아마 그때 이미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했던 100일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날은 소감문으로 끝을 기념했다. A4용지 1장 반 정도의 분량을 편한 마음으로 낭독했다. 낭독 전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상태였다. 그는 몇 번 퇴고했는지 물었고, 소감문의 내용이 너무 좋았다고 했었다.
첫 시작은 좋아하는 영화인 빌리 엘리어트의 대사였다. 아버지는 빌리의 천재성을 발견한 뒤 빌리의 형에게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말을 했다.
'빌리는 어쩌면 천재일지도 몰라.'
나는 이 장면을 보려고 그렇게 빌리 엘리어트를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십 년 동안 굳건한 신념으로 살아온 그가 우연히 발견된 반짝이는 작은 보석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작은 가능성과 기적에 그가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 간 쌓아온 신념이 잘못되었나?, 빌리는 나와 같은 인생이 아닌 다른 생이 가능해질까?.
나는 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목표대로 100일 글쓰기를 했었고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더 끈끈해진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낭독을 마쳤고, 몇몇 사람들의 소감을 들었다. 그중 생각나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글에 있었다였다.
그 간 써왔던 글들에서 공감되었던 것들을 말해주었다. 엄마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을 것 같은 그녀는 내 글에 꾸준히 댓글을 달아주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그녀가 젊게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공통적인 마음을 건들 수 있었는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이런 공통적인 부분을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 후엔 다른 사람들의 소감을 차례대로 들으며, 마지막 나의 수업을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곧 절망했다. 그 날 다른 사람의 글을 칭찬하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물론 매일 써야 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글을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각자의 장점을 공유하며 100일 동안 쌓은 마음을 교환할 때 나는 그럴 수 없던 초라한 마음과 비교가 되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는 것을 안다. 나는 그들보다 조그만 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때를 반성해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어떤 환경이나 경험에 의해서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음엔 달라져야지라는 마음 하나. 그래서 100일 글쓰기를 하기를 더 잘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공식이다. 언젠가 끝이 있는 한정된 시간에 어떤 것을 함께 하고 그 후에 느낀 것들을 정리하면 그만큼 애틋해지는 것들에 대한 크기를 생각한다. 과거에 나는 얼마나 무모했고 어디에서 용기를 얻었었나
운이 좋게도 늘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직접적으로 돕는 것도 있겠지만, 함께 할 때도 돕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별 볼일 없는 '나'의 존재가 더 중요하면 '너'에 대한 고마움의 농도가 나도 모르게 희석된다. 문득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크기를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고마움은 교환되는 게 아니지만, '너'의 고마움의 크기에 비해 내 고마움이 작아 보일까 손에 쥔 고마움을 등 뒤로 감춘 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았다.
더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고마움의 농도를 생각하게 될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고마운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타협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배워간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작고 작아 나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나도 이 작은 마음이 괴로워서 아무도 모를 내 마음을 미워서 퉁 하고 구석으로 몰아버린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작아지고 많이 부끄러운 '나'가 된다. 나조차도 끄집어내야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작은 크기.
그러다 아예 잊어버릴까 봐 늘 상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당한 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건 과거보다 조금은 더 성숙하고 덜 부끄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자라는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참 쉽게 기분이 좋다가 나빠지기도 한다. 언젠가 기분이 너무 안 좋은 날, 오늘의 운세를 본 적이 있었다. 오늘의 운세에 오늘 하루가 좋다고 나와서 좋은 일이 가득하다는데,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만약 오늘 기분도 좋았고 좋은 일도 가득했었으면 오늘의 운세가 맞는구나 라고 단순하게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즈음 나는 오늘의 운세와는 달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수많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을 보면 궁금해진다. 저 사람도 오늘의 운세를 읽어봤을까. 저토록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저 사람의 오늘의 운세는 어떨지. 그런 생각을 해봤다.
오늘 하루도 어느 신문에는 조그만 글씨로 나의 운을 적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이 평범한 하루들에도 오늘의 운세가 적용된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신기한 일일 수 있겠다. 평범한 하루에 일상이 더해져서 진해 지거나 옅어지거나 커지거나 작아지는 마음속에서도 어딘가의 마음, 그 마음 한편에 작은 운 하나 넣어 마음과 고마움의 크기가 훨씬 커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