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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운 Mar 27. 2024

이토록 평범한 미래 (2)

다섯번째 단편, 엄마 없는 아이들


그럼에도 명준은 이십여 년이 넘게 배우로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며 살았고, 감독이 원한다면 권투선수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어떤 몸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몸은 점점 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명준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몸이 죽기로 결정하면 그가 계속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를 느껴보고 싶지 않다. 모른다는 영역에선 두려움의 감정이 더 클 것이고, 그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아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동안 받아들여야 할 진실엔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덤덤하고 무더운 여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여름이 명준의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감정들이 무덤덤한 일상 아래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 젊음엔 가능성과 희망이 공존한다. 최대의 가능성.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관찰하고, 발생한다.


그것은 여름의 얼굴이었고, 그가 그녀에게서 사랑의 기미를 느꼈던 얼굴이었고, 여름이 끝나자 사라져버린 얼굴이었다.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 이상더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 여름은 내내 존재할 것 같았지만 이 역시 지나가고 끝나버린다. 그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 지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여섯번째 단편,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그렇게 노래는 멈추고, 조명은 정지하고, 객석은 침묵에 빠졌다. 희진은 당장 울음을 그치고 싶었으나 그건 마음먹는다고 되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울음의 주도권은 울음이 쥐고 있었다. 그때 객석의 한쪽 귀퉁이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힘을 내라는 의미의 박수라는 걸 꺠달은 다른 청중이 동조했다. 박수 소리는 이내 객석 전체로 퍼졌다. 다시 한번, 그 밤의 빛이 희진의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함께 나란히 서서 바라본 빛일지도 모르겠다.


-> 위로가 주는 힘은 위로를 받은 사람은 안다고 했다. 안다는 것은 경험 했다는 것이고, 경험은 공유될 수 있다. 누군가 빛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이고 그 빛을 통해서 서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 내가 무심코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누군가에겐 깊은 기억으로 남을 때가 있다. 나역시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곱번째 단편, 사랑의 단상 2014


숫자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옛 보안 카드를 가위로 잘게 자르다가 지훈은 왜 그랬는지 기억해냈다. 그 은빛 캡슐은 몇 년 전 한정판으로 출시된 것이었다. 한 통에 열 개의 캡슐이 들어 있었는데, 한 잔 한 잔 마실 때마다 그해 봄을 보내는 게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캡슐 하나를 그 서랍에 넣어둔 것이었다.


-> 과거로의 여행은 문득, 불현듯, 순간적으로에 가깝다. 사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진다. 그러면 그땐 안보이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겨우 말만 남았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훈은 이제 리나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문이 열린다 해도 그 비밀번호가 진짜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었다.

옛날 이야기. 모두 옛날이야기

꽃이 지는 건 꽃철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는 건,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에.


->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사실은 지금의 사실이 아니게 된다. 비밀번호가 변하지 않아도 지금의 비밀번호는 그 때의 비밀번호가 될 수 없다.


그 하트 표시를 바라보다가 사랑해라고 입력해보았다. 문득 사람들이 언제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서였다. 곧 그 말이 포함된 기사들이 검색됐다.


-> 누군가를 그리워하여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말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들.


여덟번째 단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내가 출판사에 편잡자로 취직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 수수께끼같은 시대에, 경험해보지 못 할, 시간이 지나 오래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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