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의 숨결이 닿은 비밀의 정원, 외암마을 건재고택

과거의 풍류를 빌려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시간

by 혜원

도심과 시골, 현대와 중세가 공존하는 묘미

충남 아산은 서울에서 한 시간이면 도착할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그래서인지 지방의 소도시답지 않은 세련됨이 있다. 그에 반해 풍경을 살펴보면 강과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의 모습과 논밭이 끝없이 펼쳐진 시골의 풍경이 공존한다.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 덕분에 상당히 재미있는 도시이다. 그런 세련된 장소와 공존하며 500년 역사를 지켜내고 있는 외암민속마을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다.


고택과 초가집이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풍경이 마치 조선 시대의 한 시절을 뚝 떼어 놓은 것처럼 생경스럽다. 그런 생경스러움 덕분인지 아산 하면 가장 먼저 외암민속마을을 떠올리게 된다. 외암민속마을에는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충청 고유 격식인 반가의 고택과 초가 돌담 등이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풍경이 여간 정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계절 가슴앓이 하게 만드는 마을의 사계

외암민속마을은 사계절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담고 있다. 봄이면 자연과 더불어 생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짐이 좋고, 여름이면 담장마다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멋스러움을 더한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심어져 있는 나무의 가을빛이 아름답기만 하고, 겨울이면 초가집과 고택 사이 시냇물이 담뿍 얼어 투명하고 말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도 참 예쁘다.


특히 겨울에는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가지가 그리는 풍경이 고택과 담장의 자태와 안성맞춤으로 어우러진다. 사시사철 이렇게도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사계절 어느 때고 가슴앓이하듯 이곳을 잊지 못한다.


닫힌 문 너머로 마주한 한국 최고의 정원, 건재고택

kuburuzin tree.jpg 활처럼 굽이진 가지 끝에 걸린 세월, 건재고택이 품은 고귀한 아름다움

외암민속마을의 가장 메인이 되는 고택이 따로 있다. 그곳은 바로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외암민속마을의 시초가 되는 이간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1800년대 후반 영암군수를 지낸 건재 이상익 선생께서 개축해 현재 국가민속문화유산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이간은 마을 중심부에 터를 잡고 이곳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외암마을에서 보냈다. 그의 사상과 문학, 그리고 철학은 외암민속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하여 외암민속마을과 건재고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다.


건재고택은 상시로 드나들며 관람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루에 2회 시간을 정해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는 비밀스러운 곳이다. 그러기에 더욱 호기심이 인다. 건재고택 입구로 들어섰을 때 필자는 사랑채 앞 정원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우리 고유의 고택은 사랑채 앞을 여백의 미로 채우는 데 반해, 이곳 건재고택은 아주 화려하다. 그 화려함이 이질적이지 않고 건재고택과 호흡을 맞춘 듯 딱 맞아떨어진다.


활처럼 휘어진 소나무뿐만 아니라 은행나무, 감나무 등이 입구 정원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어 고택의 멋을 한층 끌어올려 준다. 특히 입구에 심어진 소나무는 휘어진 모양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풍수지리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휘어진 나무를 심어 외부의 문으로 복이 나가는 것을 방지한 일종의 방편이라고 한다. 그런 사연을 미리 알고 방문하신다면 보는 즐거움이 더해질 것이다.


무너질 뻔한 시간을 지켜낸다는 것의 무게

건재고택 내부에는 설화산 자락의 물길을 집안 내로 끌어들여 수로를 만들었다. 이 또한 우리 선조의 풍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건재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처가댁으로 추사는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시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고택의 현판을 찾아보면 추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또 다른 기쁨이다.


건재고택은 2019년 경매 낙찰로 아산시에서 매입했다. 후손의 채무 문제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사연이 없는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건재고택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재고택이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사라졌다면 선조께서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정신도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개발 위기에 몰려 있는 유물을 보존하여 후대에게 정확히 전해주는 것이라는 책임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랜 내공이 숨어 있는 장소에서 나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한다. 수수께끼 하듯 곳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찾아내며 뜻밖의 지혜를 얻는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건네는 작은 위로 덕분에 오늘을 살아낼 용기와 위안을 받는 것은 덤이다. 그것이 선조께서 남겨주신 훌륭한 문화유산이며 유물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오랜 담장 밑에서 나눈 무언의 대화는, 소란했던 마음을 다독이며 내일로 향하는 다정한 온기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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