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가파른 계단 끝에서 만난 평화와 위로
강원도 정선은 도로가 닦이기 전까지는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오지 중의 오지였다. 하지만 정선 오일장 여행 상품이 히트를 한 후 지금은 강원도를 상징하는 대표 여행지가 되었다. 정선은 오일장만 보고 간다면 아쉬울 정도로 깊은 산세와 골지천, 송천이 만나 흐르는 강이 휘휘 돌아가는 풍경이 기가 막히다.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첩첩산중에 가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귀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깃들어 있다. 고달픈 삶을 견뎌내기 위해 한탄을 섞어 불렀을 정선아리랑의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필자에게 정선은 그러한 의미로 남아 있다.
오늘 소개할 정선의 명소는 바로 정암사이다. 정암사는 함백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그 창건 유래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정암사가 더욱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멸보궁이라 함은 석가모니의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직역하자면 온갖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난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의미다. 일반인에게는 적멸보궁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 있지만, 불교를 종교로 가진 분들에게 적멸보궁이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하여 5대 적멸보궁을 성지순례 하는 불자들도 대다수이다.
보통의 사찰은 대웅전이 중심이 되지만 정암사는 적멸보궁이 중심이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가 모셔진 곳이라는 의미에서 전각 내부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 차이점을 알고 방문하신다면 더욱 뜻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는 보통 사리탑이나 계단 안에 봉안되어 있는데, 정암사는 국보로 지정된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모셔둔 수마노탑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사찰의 가장 꼭대기에 있어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마치 인생은 고행길이라는 진리를 몸소 느껴보라는 듯 말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힘에 부칠 때 즈음 수마노탑을 마주할 수 있다. 수마노탑이라는 이름은 자장율사가 서해 용왕의 도움으로 가져온 마노석으로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만든 모전석탑의 형식을 띠고 있어 마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도 닮은 모습이다.
외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지만,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 수많은 이들의 기도가 여운이 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수마노탑 앞에 서면 정암사의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수행하듯 마음을 다스리며 머물다 보면 정암사의 가치를 그때야 느낄 수 있다. 한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정암사의 풍경을 말이다.
수마노탑 아래에 서면 유홍준 작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찬한 정암사의 공간 배치를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유홍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가파르고 좁은 산세에 자리했으면서도 절묘한 공간 배치로 아늑하고 그윽하고 호쾌한 분위기를 두루 갖추었다고 표현했다. 좁은 절 마당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모든 전각과 탑까지 산자락을 타고 앉아 있다. 과연 직접 눈으로 살피니 절묘한 공간 배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풍경이다. 수많은 이들의 간절함과 선조의 지혜로움까지 그 모든 것에 감사하게 만드는 정암사에서 수마노탑은 단연 정암사의 정수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이번 여행길에는 2월 말임에도 뜻하지 않게 함박눈이 쌓인 때에 방문하게 되었다. 흰 눈에 덮인 산세와 어우러진 정암사의 풍경은 축복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차디찬 천년의 돌 위에 쌓인 흰 눈이, 시린 삶을 묵묵히 견뎌온 우리네 마음을 따스하게 덮어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