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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권고사직

by 시계꽃 Ma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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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




제목 그대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2주 하고도 이틀 전, 생애 최초 비자발적 퇴사를 경험했다. 사유는 고용24 홈페이지의 이직확인서에 따르면 "직제개편에 따른 조직의 폐지·축소, 회사의 업종전환, 일부 사업 또는 작업형태의 변경으로 인해 사업주의 퇴직 권고"다. 한국어로 옮기면 팀프로젝트 중단으로 인한 팀의 해체다. 퇴사일로부터 사흘 전 임원 회의에서 프로젝트 중단이 결정되었으며 팀은 해체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니까 타임라인을 다시 정리하면, 회사는 2월 17일에 우리 팀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엎기로 결정을 내렸고, 다음 날인 18일에 부서의 총책임자인 전무가 "당신의 팀은 해체되었습니다"를 알려 왔고, 나는 이틀 뒤인 20일에 잘린 셈이다.



글자에도 표정이 있다면 연봉계약서에 프린트된 글자들은 상당히 '엄근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박혀 있는 "을이 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1개월 전 갑에게 사직서 및 업무인계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이 무색하게 사측의 계약 해지 절차는 누구보다 빠르게, 또 남들(a.k.a. 노동자)과는 다르게 처리되었다.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사방이 막혀 어느 방향으로도 흐르지 못하는 웅덩이의 고인 물(아니 썩은 물)이 된 듯한 느낌이었는데, 마지막을 이렇게 극적으로 시원하게 뻥 뚫어 주려고 그간 그토록 답답하게 굴었구나. 어느 날 상류의 댐이 예고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며 하류의 마을을 쓸어버리는 모양새다. 전무와 면담을 마치고도 여전히 자신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뇌의 처리속도는 외부 환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팀 해체를 통보받기 바로 전날, 나는 팀장에게 연봉 삭감을 미끼로, 학업과 논문 작성을 근거로, 프로젝트를 리셋하지 않는 한 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논리로 주 4일 출근과 함께 프리랜서 혹은 계약직으로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고 싶다고 제안했다. 여러 사람뿐 아니라 챗GPT의 철저한 사전 검증을 거친 덕분인지 팀장도 윗선과 협상 가능한 조건으로 받아들였고 한번 이야기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대담하게 베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안 된다고 하면 퇴사까지 불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삶이 무기력의 늪에 잠식돼 있었고, 학업을 지연시키면서까지 이 프로젝트에 나의 자원을 쏟을 이유를 더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베팅을 한 다음 날 거짓말처럼 회사가 미끼를 물어버리다 못해 아예 셧다운을 시켜버린 것이다!



놀라운 우연이 하나 더 남았다. 환장 그 자체인 팀장의 무능력(그는 지금까지 근무한 5개의 회사에서 만난 직속 상사 중 가장 무능했다. 공교롭게도 앞의 4개 회사에서의 직속 상사는 모두 여성이었고, 직무 능력으로는 누구도 그들을 깔 수 없는 속칭 '일잘러'였으며, 나는 그런 '일잘러' 상사 밑에서 인정받으며 상대적으로 '편하게' 일해왔음을 이번에 깨달았다)과 무기력의 콜라보로 탄생한 직무 스트레스는 임계점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고, 상담 선생님에게 회사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상담실에서 힘든 점을 이야기하는 게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비 상담자로서 교육 목적으로 대상관계와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 상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해결중심적인 접근법이 필요한 주제는 상담료가 아까웠다. 인생의 여러 문제가 그러하듯 뾰족한 묘수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분석가 선생님께 "차라리 권고사직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털어놨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잘린 심정이 어떤가 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면서도 좋고, 1년 간 애쓰며 매달린 프로젝트가 엎어져서 속상하지만서도 후련하고,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으니까 당장은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덜 조급하지만서도 여전히 불안하다. 끝까지 환장, 막장, 난장의 삼위일체 태도를 보여준 팀장을 향해 분노가 치솟다가도 그래, 당신은 이 회사에 10년 가까이 근무하고도 하루아침에 버림받았으니 그나마 내 처지가 낫네,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나도 내가 정확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꼭 지금의 감정 상태를 정의 내려야 하나? 나중에 후폭풍이 올지 안 올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당장 일요일 저녁이 편안하고, 제때 못 일어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며, 지긋지긋한 경의선 열차 시간표를 쳐다보지 않아 속 시원하고, 유튜브에서 본 뇌과학에 기반한 생활계획표를 따라 하며 낮잠도 자고 늦은 오후에 운동을 마친 후 개운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데. 그러다 회사 욕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팀장 놈의 헛짓거리가 생각나면 샤워하며 "미친 새끼"라고 살포시 읊조려주면 되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얼마 전 슈퍼볼에서 누가 지금 힙합씬의 원톱인지 화끈하게 보여준 켄드릭 라마의 <Not Like Us>를 들으며 방구석에서 스텝 좀 밟아주면 되지. 피날레로 제니와 도치의 <Extra L>을 들으며 "Said *uck yo' rules is a mood, damn right"을 불러주면 완-벽! 정서 조절이 뭐 별건 가.




정말 내 마음에 다른 감정이 섞여 들어가 있지 않아 이토록 쿨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추구미인 '그까짓 일로 안 죽어' 정신을 방어기제로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방어기제가 나쁜 건가?



한 가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는 점이다. 이제야 살아 있는 것 같다. (당분간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사치, 어쩌면 지금이 석사 졸업 전 주어지는 찰나의 선물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충분히 진지하고 무겁게 살았으니 2025년은 가볍고 산뜻하게 보내고 싶다. Z세대 친구들은 맛있는 음식을 두고 '섹시 푸드'라고 칭한다던데, "기후변화에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 한다"던 이웃나라의 어떤 정치인처럼(흔히 조롱의 의미로 쓰이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충분히 타당한 태도라 본다)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삼세번의 새해 다짐 기회 중 마지막을 나는 Fun하고 Cool하고 Sexy한 2025년으로 정했다. 설 연휴에 만나 친구랑 작성한 만다라트에는 '(일과 학업과 삶의) 균형'을 키워드로 적었는데 아무래도 바꿔야겠다. 펀쿨섹한 2025년, 가보자고.




작은 에필로그 


이 글은 퇴사 후 지른 맥북에어로 동네 스타벅스에서 작성했다(자랑하는 거 맞다). 개강 첫날, 상담학연구방법론 수업에 해당 노트북을 가져갔고 연달아 수업이 있어 강의실에 남아 있던 내게 신입학한 중년의 남자 선생님(상담대학원에서는 대개 호칭을 선생님으로 통일한다)이 주춤주춤 다가오시더니 맥북으로 과제를 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수줍게 물어보셨다. 아아 선생님, 제가 그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은 저도 이번에 큰맘 먹고 구매했답니다. 라는 마음의 소리를 뒤로하고 "저도 얼마 전에 산 거라 아직 잘 모르겠네요^^;"라고 실망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이어진 그분의 혼잣말. "아... 이게 제 로망이라서... (큰 소리로)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 로망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선생님. 저도 같은 마음인걸요. 를 담아 입꼬리를 힘껏 올려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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