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by 이애리

2025년은 처음이 유독 많다. 30대 후반의 삶에 아직도 낯선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축복이겠지. 2025년이라 해봤자 4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굵직한 일들을 치러내느라 상반기가 벌써 끝난 느낌이다. 공휴일이 있는 5, 6월은 훨씬 빨리 지나갈 테지. 이 글은 이정표를 남겨두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남기는 캐주얼한 기록이다.




1. 회사에서 잘린 썰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덕에 브런치 계정 개설 후 처음으로 조회수 3,000 돌파라는 푸시 알림을 받아봤다. 운빨이든 뭐든 이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구독 중인 뉴스레터에서 신인 작가 공모전 공고를 봤기 때문이다. 정식 명칭은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히든작가 작품공모였다. 3월 중순 정도로 기억하는데, 마침 <일간 이슬아>를 구독 중이었고, 덕분에 영감은 풀충전, 덤으로 창작 욕구도 함께 차오르고 있었으며, 마침 가장 최근에 쓴 글이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은 경험까지 했으니 세상이 나에게 "공모전에 지원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2. 공고를 뜯어보니 이름대로 찐으로 "신인 작가"를 위한 공모전이었다. 최근 2년간 ISBN에 등록된 출간작이 없어야 응모가 가능했다. 문제는 저 기준에 번역서도 포함되느냐였다. 마음을 졸이며 문의한 결과, 번역서는 카운트하지 않는다는 담당자의 답변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 됐다!


3. 에세이 부분 응모에 필요한 글은 총 5편. 당선 시 거의 5개월 안에 단행본을 출간해야 하므로 어쨌든 최소한의 원고를 확보한 상태여야 했다. 그간 브런치에 썼던 글, 웹진에 기고했던 글, 메모장에 기록한 짧은 글을 탈탈 털고, 새로 쓰고 싶은 글들의 주제를 하나로 잇는 작업을 거친 후 브런치에 썼던 글 2편과 새롭게 3편의 글을 써서 응모하기로 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흩어져 있어서 몰랐는데 모아서 보니 글들이 꽤 쌓여 있었다. 과거의 나에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4. 3편의 글을 새로 써내는 건 쉽지 않았다. 마감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은 대학원 졸업을 결정할 수도 있는, 이번 학기 최대 고민이자 과제인 "지도 교수 정하기" 태스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내가 쓰고 싶은 논문은 석사 수준에서 쓰기 가장 어려운(... 진짜 난 왜 이러는 걸까...) 연구 주제였다. 주제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실험 설계라서 시간과 비용이 배로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된다. 교수님은 여차하면 6학기까지 각오해야 하고, 석사 논문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박사 가서 하라고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하셨으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해야만 하는 (...) 고집쟁이는 6학기도 불사하겠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패기로 오히려 교수님을 설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논문방에서 "치료 효과 연구에 목숨 건"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5. 학교라는 조금은 특수한, 공적과 사적의 공간 사이에 놓인 이 애매한 장소에서의 인간관계는 정말 미묘하고 복잡했다.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혼자 상처받고 혼자 울고 짜다가 상담에서 털어버리고를 반복했다. 학교는 투사를 덜어내는 훈습의 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신기한 일들을 겪었다. 정신분석 상담을 받는 이유에는 물론 상담자가 되기 위한 교육 목적도 있지만, 불안을 통제하느라 쓰는 에너지의 누수를 막고 싶었다.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신경 쓰고,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온갖 필터링을 거치는 행동을 그만하고 싶었다. 아직 연습 중이지만, 스스로에게 "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라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직은 글로 풀어내기엔 충분히 영글지 않아서 마음에 품고 숙성 중이다. 상대가 받아들이건 말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내보여도 괜찮다고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조금씩 나를 믿는 힘이 자라고 있다.


6. 마지막으로 이번 봄에는 따뜻한 말도 많이 들었고, 따뜻한 소식도 많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일을 벌리든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격려해 주는 친구, 그리고 그의 이직 성공. 오래 사귄 애인과 결혼 소식을 알려온 친구, 그리고 그 덕에 진짜 오랜만에 잡힌 청첩장 모임 겸 노훈녀(노어과 훈녀들) 모임, 인정하는 다독가이자 러시아 유학 시절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친구가 브런치의 모든 글을 정독했다며 보내온 응원 메시지, 쌍둥이 육아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몸은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온전히 내 편이라며 항상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라던 고등학교 친구의 말에 울컥했던 월요일 밤. 이렇게 기록하는 건 자주자주 꺼내 보기 위함이다. 재쓰비 노래의 가사처럼,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면 네 곁에 나를 믿어." 플레이디오에서 흘러나온 말처럼, "응원은 사랑과 똑같으니까."


7. 공모전 원고는 마감일인 4월 25일 오전에 무사히 제출했다. 결과 발표가 난 다음에 후기를 기록할까 생각도 했지만, 결과 여부와 상관없이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졌기에, 그리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지난 4개월을 정리하는 의미로 짧게 소감을 남겨두고 싶다. SNS에서 쓰는 닉네임이 아닌 이름을 걸고 내 글을 타인에게 발표하는 건 처음이다. 이게 내면의 어떤 벽 하나를 깬 순간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내보이는 연습 과정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부캐나 익명성에 기대지 않고 투명하게 내 이름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욕망을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내 감정에 더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것. 이름에는 생각보다 큰 힘이 깃들어 있다.


8. 연재 중인 브런치북은 그 짧은 사이에 담고 싶은 주제가 너무 커져버려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처음에는 '덕질'에 포커싱을 두려 했으나, 덕질하는 대상들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자꾸 덕후에게 사랑에 대한 깊생을 하게 만들어서 어쩔 수가 없다. 최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완독했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을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사랑에 대해 공부 중이다. 이게 다 김남준 때문이다(?).




(결과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당선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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