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Tomáš Nožina
1. 6월 11일. 과제 제출을 마지막으로 석사 2학차가 끝났다. 이번 학기는 전업 대학원생으로 지내서인지 확실히 농도가 달랐다. 우선 가장 큰 수확은 산뜻한 태도다. 1학차에는 성적에 욕심을 냈다. 절대다수의 시간을 회사에 쏟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성적이라도 잘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해야 돼' 강박을 지우니까 과제든 발표든 시험이든 시작까지 걸리는 시간이 확실히 줄었고, 결과에도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책장에 꽂혀 있는 문보영 시인의 <준최선의 롱런>에 그은 밑줄의 의미를 이제야 실감한다.
대충하는 것은 아닌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묵묵하게 롱런하기. 준최선에서 한 계단만 오르면 최선이기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에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계단 내려와서 쉬고. 최선이 비켜난 자리에 친구가 여유, 딴생각과 재미, 그리고 소중한 것들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pp.34-35)
2. 최선이 비켜난 자리를 채운 건 사람이었다. 그리고 산뜻한 태도는 사람을 대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실습수업 마지막 날, 수강생 모두와 함께 회식을 했다. 많이 말했고 많이 웃었다. 마음이 편하니 행동도 자연스러웠다. 약간 경직된 다른 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의 속도를 존중할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기꺼이 광대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장난 섞인 놀림에 같이 푸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제 과거 이야기가 재밌으신가요? 많이 웃으셨나요? 그럼 됐지요. 예전 같았으면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너무 나댔나?' 자문하고 반추에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며 말과 행동을 일일이 검열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역시 너무 말이 많았나 싶긴 했는데 금방 잊어버렸다. 당신에겐 오해할 권리가 있고 그 오해를 굳이 내가 바로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모임에 나갈 때 '오늘 10번 웃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라셨던 상담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관계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종강 모임 공지를 보고 망설이는 나에게 건강한 도파민을 충전하는 자리라고 입력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3. 산뜻한 태도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야심 차게 준비한 경기히든작가 공모전은 똑 떨어졌다. 왜지? 솔직히 내 글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 홈페이지에 들어가 당선작들의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결과에 수긍했고 첨부된 심사평을 읽으니 내 글이 왜 떨어졌는지 납득이 갔다. 나의 장점인 성찰적 글쓰기를 살리는 동시에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에 더 공을 들일 필요가 있었고, 이에 더해 같은 소재라도 살짝 비틀어 참신성을 추구하는 전략도 있어야 했다. 마침 익숙한 쓰기 방식에 점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프리랜서 모임에서 이 부분을 정리해 사람들과 나눴고, 모임장인 서재관리자님은 독립서적 입고 신청을 받을 때 너무 감성적인 글은 반려한다고, 명확한 주제가 있는 글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말씀하셨던 <챗GPT와 고민 상담> 그 주제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시의적절한 기획인 것 같다"고 했다.
4. 경기히든작가 공모전에 떨어지고 나서 부랴부랴 인스타그램에서 본 에세이 앤솔로지 공모인 <챗GPT와 고민 상담>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솔직히 공모전 탈락에 심적 데미지가 있어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분명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스스로를 어르고 달랬다. 심지어 원고 한 편은 실컷 다 써놓고 실수로 첫 두 문단 제외 다 날려먹기도 했다. '... 그냥 다 때려치워!'를 외치며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겨우겨우 정신을 붙들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마감 2분을 남기고 메일 발송, 그리고 다음 날 뻗었다.
5. 발표를 기다리며 수업 과제에다가 내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온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마음으로 공모전의 실패를 자기 비난으로 돌리지 않았다는 문장을 썼다. 사실이었다. 앤솔로지 공모에 선정이 되었고, 8월 말 혹은 9월 초에 책이 나온다는 공지를 받았다. 나를 포함해 14명의 작가들의 이야기가 전부 다 다르다고 했다. 독자로서도 예비 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이 AI를 어떻게 상담과 연결 지어 사용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6. 드. 디. 어. 2025년 6월이 왔고 방탄소년단도 왔다. (대충 mic dr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