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글의 서문
나는 옷 앞에 서면 창피하다.
‘교만을 입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에 그렇다.
교만은 나에 대한 교만도 있지만 자연과 만드는 사람에 대한 교만도 포함된다.
후자의 교만을 먼저 설명하자면, 나의 옷장엔 직접 오랜 시간 고민하며 고른 잘 만들어진 옷이 많다.
잘 만들어진 옷이란 ‘비싼’ 옷이 아닌 좋은 사람이 잘 만들려 노력한 옷을 의미한다.
이는 ‘장인정신’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이 만드는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입고 있나?’라는 고민은 옷을 구매하기 이전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장인정신에 대해서는 하나 더 이야기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클래식 범주에서의 남성복은 예로부터 자연 그대로를 착용한다.
동물에게서 털을 빌리고 식물에서 새로운 실을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입고, 그것으로 또 자연을 이겨낸다.
결국에 나 자신은 자연앞에 한없이 약한 자이자 자연의 작은 톱니바퀴중 하나일 뿐이다.
장인들은 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허투루 고르고 허투루 사용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이해도와 자연에 대한 존중으로 원단을 만들며 그것으로 옷-혹은 신발이나 모자 등-을 만든다.
나는 그 부족함 앞에 한 명의 소비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손과 경험으로 잇는 장인을 존경한다.
잊혀지는 것을 잊혀지지 않게 하며,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고 그에 따른 경험과 자신의 깊은 고뇌를 담아내는 ‘장인’이라는 존재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나 싶다.
나는 부족하다.
이제 전자의 교만을 설명하겠다.
보이어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다른 민족들이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과학기술 제국을 건설하고, 스스로의 사명감을 고취시켜 세계를 감시하거나 은하계를 탐험하고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고자 할 때, 이탈리아는 최신 초소형 컴퓨터나 초고속 입자가속기 혹은 초강력 ICBM보다는 우아한 구두 한 켤레나 고귀한 와인 한 잔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축복받은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개별적이며 친밀한 기쁨을 제공하고자 했다. 물론 핸드메이드 린넨 셔츠가 초전도체나 힉스입자가 미사일 드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우리의 삶에 더 밀접한가?”
보이어의 이 깊은 고뇌는 인류의 삶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나?’라고도 해석하고 싶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해야지 자신의 삶에 밀접하게 접목시킬 수 있냐이다.
나는 누구이며, 언제 살아가며, 어디에 위치하는 자이며, 무엇을 하는 자이자, 어떻게 살아야하며, 왜 존재하는가? 라는 도덕적이자 인문학적이며 어찌 본다면 종교적인, 그러나 교만이라는 것 하나에 내가 중심이 되며 모두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 끝없는 질문을 나의 삶에 던진다.
교만은 창피함을 입는 것이다.
또한 ‘나’를 입는 것이다.
나는 나를 버리지 못했기에 자연 앞에도 내가 믿는 종교 앞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나는 창피하여 무화과 잎을 치마로 입은 사람이고 가죽옷이 입혀져 내쫓긴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 창피함을 가리려 입은 것을, 에덴동산에서 내쫓기며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선물 받은 ‘진정한 옷’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글을 쓰고 또 입는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지기를, 입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입을 것인가?
나는 그 고뇌를 한 명의 남자로 전한다.
그렇기에 글을 적을 때에 한 마디에 무척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 글들은 수많은 옳은 레퍼런스에 대한 해석과 나의 고민으로 적힌다.
한 단어마저 조심스럽다.
옷을 해석하는 데에는 더욱이 그렇다.
앞에서도 스쳐 지나듯 언급했지만 성경에 의하면, 옷은 인간이 죄를 깨달았을 때 인간이 행한 가장 첫 번째의 행동으로 탄생했다.
나는 죄를 입는 것인가?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선물 받은 것 또한 가죽옷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결과적으로 나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무화과 옷을 지어 입을지 가죽 옷을 입을 지는 내가 선택할 문제이다.
나는 어차피 입을 것이라면 가죽 옷을 입기를 원한다.
나는 가죽옷을 찾기 위한 연구하고 글을 적는다.
무엇이 가죽옷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저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것을 연구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적을 뿐이다.
나의 글은 그렇기에 일종의 성직자를 닮아가고 싶은 교만한 나에 의해 적힌다.
공부는 끝이 없다.
알던 것도 틀렸을 때가 많고 틀렸다고 생각한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글을 적을 때에 가장 어려운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의 변화 따른 혹은 깨우침이나 교만함에 따른 결과값은 계속해서 바뀐다.
따라서 나의 글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그 순간만큼은 옳은 글을 전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에 대해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고민하고 공부하지만, 그렇기에 글이 늦다.
계속된 질문으로 나를 몰아 세워 더욱 옳아 보이는 답과 논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나 삶이나 긴 호흡이 필요하다.
짧은 호흡으로는 깊이와 논리의 부재가 생긴다.
다양하게 아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얼마나 깊게 아느냐도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깊이를 탐미하는 것은 바닷속을 깊게 들어가는 것과 같다.
깊게 들어갈수록 앞은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되지 않고 주변에 어떠한 생물(지식)이 떠다니는 지도 확인이 불가하고 어떤 지식을 대입하여 해석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시간과 지식이 많이 필요하지만 논리를 만든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안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가죽옷은 그 끝에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나에게 이 공포를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치며, 옷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창피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시작 되었지만 절대자에게 선물 받은 것.
입히지만 입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
가죽옷의 본질을 찾아 나서는 것.
끝없는 논리와 해석 그리고 고뇌와 삶.
그것이 나에게는 옷이다.
그러나 나는 창피함과 교만 그리고 옷을 입는다.
* 이 글 등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19SEP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