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그리고 클래식 남성복의 해석
인류의 역사와 유적에서의 출토품을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패션에 관련된 악세서리들을 고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많은 것은 사치품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이는 예술인가?
그렇지도 않다.
극단적인 예로 프랑스에서 정의한 10대 예술에 패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10대 예술 : 1 : 건축 2 : 조각 3 : 회화, 드로잉, 사진 등을 포함하는 시각예술 4 : 음악 5 : 시, 소설 등 글쓰기를 포함한 문학 6 : 무용, 연극, 오페라, 서커스 등을 포함하는 공연예술 7 : 영화 8 :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포함하는 미디어 예술 9 : 만화(comics) 10 : 비디오 게임 및 멀티미디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미디어 예술과 비디오 게임들에 비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음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래 존재해왔던 패션은 예술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예술을 패션에서 제외한다면, 패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에는 또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역사에 남은 패션은 귀족과 왕족의 의복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구로서의 가치본분을 명확히 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필요할 것 같다.
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도구에 대한 신발에의 비유와 해석의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농사짓는 여인이 신고 있는 신발에 집중한다.
신발은 그곳에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노동중의 여인은 신발에 대해 점점 덜 생각하게 되거나 신발을 보거나 느끼는 것조차 덜 하게 된다.
그럴수록 신발은 더욱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여인은 신발 속에 서 있고 걸어간다.
신발은 그렇게 그것의 용도로 쓰인다.
이러한 사용과정에서 하이데거는 도구다운 측면을 실답게 마주치는 것이 틀림없다 이야기하며 용도로 쓰인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패션내의 의복은 어떠한가?
도구의 본분에 충실한가?
도구 자체의 본질로만 본다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여인의 행동에 집중하여 이를 해석해보자.
여인의 행동은 어떠한가.
여인의 행동의 목적은 농사를 짓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것은 무엇인가.
농사는 어떠한 사람이 멋을 부리기 위해 짓는 것은 아니다.
농사의 본질은 인간이 무엇을 먹고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행위이자 돈을 벌어 살아가기 위해 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이는 삶에 있어 필요조건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신발은 농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조건이다.
결론적으로 신발이라는 것은 삶의 필요성과 함께 하며 그곳에서 잊히는 것이다.
잊히는 것은 용도로써의 충실한 이행이다.
다시 패션으로 돌아가서 도구의 필요충분에 대입을 해보도록 하자.
화려함을 대변하는 패션은 도구로서는 제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삶의 필요성 부분에서는 무조건적인 필요함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즉,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적인 존재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복을 입고 농사를 짓거나 살아감을 위해 입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남성복은 어떠한가?
이는 현재 패션이라는 범주에서 입히기에 비슷하다.
하지만 본질이 다르다.
패션은 디자이너들의 손에 의해 탄생된다.
과거에는 원단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손부터 탄생된 것이다.
남성복은 그러나 1666년 검소함을 강조하며 쓰리피스수트를 선보인 찰스2세(Charles II of England, 1600-1685)의 선언으로부터 우아함을 포기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댄디의 아버지라는 보 브러멜(George Bryan ‘Beau’ Brummell, 1778-1840)의 원단에 대한 여러 시도에 의해 화려함과는 더욱더 멀어지며 남성복의 계층 간 차이는 사라져만 가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후의 댄디는 패션이라는 면모가 더욱 강조되며 소위 ‘멋쟁이’라는 의미로 새로운 상류 사회에 소비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은 찰스2세의 선언과는 멀어 보인다.
19세기까지의 사회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격동은 남성복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19세기말부터 현대화되기 시작하는 남성복의 문화는 현재의 클래식 남성의복이라 불리기 위한 꽃봉오리를 피우기 시작한다.
현재의 남성복은 어디서 왔는가?
아주 흥미로운 것은 남성복은 거나하게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떠한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되어 선풍적인 인기로 세상을 잠식한 것도 아니다.
남성의 의복은 필요에 의해 많은 이름 모를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클래식 남성복의 원형을 쫓다보면 도출할 수 있는 결과는 전쟁에서 넘어온 의복들이 많으며 남성들의 일터나 그들의 사회에서 온 의복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의 여인의 신발과 같이 대입을 해보도록 하자.
전쟁터나 일터 혹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의 의복은 농사를 지으러 나간 여인의 신발과 같이 그 자체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
여인이 농사의 ‘행위’를 위해 신발이 신어지듯, 남성들은 속한 전쟁터나 일터 혹은 사회에서의 그곳에 맞는 ‘행위’를 하게 되며 그곳에서 입혀진 의복은 여인이 농사를 위해 입은 신발과 같이 행위를 위해 입혀진다.
이는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회로, 농사의 본질과 같거나 비슷하다.
따라서 의복은 그 공간들에서 남성들에게 입힘과 동시에 잊혀진다.
결과적으로 남성에게 의복이란 잊히기 위한 것이다.
이는 도구로서 완벽한 본분에의 충실이다.
위에 설명한 남성 의복의 도구로서의 존재 본분과 그에 따른 해석은 그들의 사회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한 사회를 남성들은 구성했으며, 구성하기 위해 의복을 도구로서 입는 것은 해당 사회의 남성들이 서로 같은 옷을 입었다는 것을 입증하며 그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의복을 하나의 도구로 잊히게 만들려 함이라 해석한다.
결국 남성복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간에 일종의 유니폼(Uniform)이자 해당 사회에 대한 정복(正服, 옳은 의복이라 해석)이다.
도구에 대한 해석에서 다시금 패션으로 돌아와 ‘잊혀짐’을 해석해보도록하자.
현재의 패션은 ‘잊혀짐’이라는 것이 일단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패션쇼’라는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잊혀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삶 안에서의 인간의 삶을 위한 집중이다.
그러나 패션쇼라는 것 자체는 의복에 대한 집중으로 모든 이목이 쏠린다.
시각 자체가 나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시각이 아닌 남과 의복에 대한 집중으로 쏠린다는 것이다.
패션쇼가 만들어내는 존재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패션쇼는 유행을 만들어낸다.
유행은 한 브랜드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미디어에 노출이 되고 여러 사람들과 브랜드의 손에 의해 증식되어간다.
이것은 바이러스와도 같은 전파력을 가지며, 바이러스와 같이 잊히지 않고 눈에 계속 밟히며 존재감을 항상 느낄 수밖에 없게 ‘존재’한다.
여인의 신발과 ‘존재’라는 본분에는 동일하지만, ‘잊혀짐’에서는 패션은 여인의 신발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패션쇼와 브랜드 이것들은 모두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인의 농사와 같은 ‘개인’의 삶이 아니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는 개인에 침투된다.
인간이 바이러스에 걸리면 그 질병의 발현이 몸 밖으로 나와 고통스럽듯, 패션이라는 바이러스 또한 몸 밖으로 나오게 되며 질병을 고통으로 인식하듯 개인은 인식하게 된다.
이 바이러스는 사회에서 잊히며 삶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존재감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삶을 뽐내고 싶은 개인의 시각과 사회가 만들어낸 무엇이다.
현재의 클래식 남성복의 입힘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현재의 클래식 남성복은 패션과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가 말하는 댄디의 존재와 비슷하다.
보들레르는 댄디를 추구하는 남성들을 ‘자아숭배’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덧붙여, 그들은 무관심속에 우아함을 쫓고 충분한 돈과 시간이 있음에도 이를 추구하지 않으며 이 또한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인물들이며 남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자신은 절대로 놀라지 않는 오만한 만족마저 가지고 있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이들은 무관심을 추구하지만 이들만큼 자신을 꾸미는 데에 온 정신을 바치는 이중적인 존재들은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보들레르는 댄디즘이 ‘지는 해’라 표현하였지만, 이는 여태 ‘떠있는 해’이다.
남성들은 옷이 잊혀지고 자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잊혀지고 옷이 돋보이는 그것을 택하였다.
이 오만한 만족과 무관심은 누구보다 겸손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지만 무관심을 인식하고 만족하는 순간 겸손은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댄디즘-혹은 댄디-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보 브러멜(George Bryan ‘Beau’ Brmmell, 1778-1840)은 왕족과 귀족 사교계에 하위계층의 의복문화와 원단의 새로운 사용법과 새로운 재단방식을 남성복에 가져옴으로 엄청난 혁명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져 바지가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초라한 거지로 살고, 매독에 걸려 정신이 나가 정신병원에서 초라하게 죽었다.
댄디의 아버지의 말로는 그 누구보다 초라했으며 겸손은 찾아볼 수 없었고 욕심과 오만에 대한 허무함까지 느껴진다.
물론 보 브러멜은 위대하다.
그가 남성복에 일으킨 혁명은 지금의 클래식 의복에 기반이 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힘인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수트는 귀족 혹은 왕족의 의복이 아닌 일반계층이 입는 옷이 착안되었고, 소재 또한 그렇게 되었다.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2세로부터 시작된 ‘검소함’의 선언은 보 브러멜로 인하여 구체화되었으며 남성들은 패션을 떠나 자신의 삶과 세상의 규율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댄디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를 문화사학자인 마우리지아 바스칼리(Maurizia Bascagli)는 댄디의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은 자기희생, 예의범절, 봉사, 책임, 직무로 이루어진 기사도 정신에 반대입장에 서있다고 이야기 하고, 중산층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추문을 일으켰던 것은 그 어떤 동성애적 에로티시즘의 조짐들보다도 댄디의 무익성, 여성스러운 나약함과 자기도취적 무위라 설명한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 또한 젊은이들에게 수트 안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유행을 만들어 냈지만 댄디라는 것 안에는 큰 공허가 존재한다고 판단하며, 그 공허를 [‘왜 입는가?’에 대한 질문의 부재(不在)]라고 결론짓고 싶다.
개인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댄디를 쫓을 것인가 혹은 ‘왜 입는가?’라는 것을 재고할 것인가 말이다.
추구하던 의복의 형태는 다르지만 패션과 댄디는 상당부분이 닮아있다.
유행을 선도하며 그 유행을 사회에 퍼뜨리고 그로 인한 사회, 경제, 문화를 창출해낸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가?
영원보다는 사회, 경제, 문화에서 단편적인 역사밖에 서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해당의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앞서 말한 듯 보 브러멜이 남성복에 혁명을 일으키거나,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1934-)가 기성 수트에 혁명을 일으켜 남성의 기성 수트가 변화되는 일종의 혁명 혹은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 1835-1926)의 개버딘과 같은 원단의 혁명과도 같은 역사적인, 사회를 구성하며 남성들의 삶과 옷장에 큰 영향을 끼친 혁명들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패션’이라는 것으로 본다면 댄디와 같이 이중적인 오만함뿐이 찾아볼 수 없다.
이야기의 흐름을 여인의 신발에서 벗어나, 바스칼리가 이야기한 기사도 정신의 개념에 집중하여 이를 패션에 대입한다면 이를 패션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오만함이 아닌 자기희생, 예의범절, 봉사, 책임, 직무!
이것이야 말로 삶에 가져야할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고 기사들이 자신에 대한 관리를 그르게 했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들만큼 자신에게 엄격한 존재들은 진정한 성직자들이 아닌 이상 찾기 힘들다.
그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다면 ‘기사도 정신’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태 ‘행동’이라는 범주 내에서 설명을 이었다.
이제는 패션에 대해 다시금 고뇌해보도록 하자.
동물이란 개체는 어쩔 수 없는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힘의 증명이며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그들은 여러 물건으로 치장하며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기도 하였으며, 이는 전쟁에서 이겼을 때 중요한 전리품으로 사용 될 수도 있었고 중요한 교역품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신석기때에도 그러하였다.
이는 다른 의미로 ‘패션의 태동은 ‘부와 힘의 상징’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역사적으로 항상 똑같이 존재하였다.
사치품은 부를 증명했으며, 훌륭한 교역품으로도 사용되었다.
사치품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잉여재산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것을 삶과 관계없는 형태로 사용을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는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렇기에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혹은 할 수 없는 희귀한 것들은 사치품으로 존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것은 가치 없는 그냥 특이한 돌멩이에 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치의 본질은 내 삶 밖에 있는 것이다.
삶의 영위에 있어 필요하지 않은 잉여재산의 실물화를 시키는 것이기에 개인의 삶 밖에 있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다.
삶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의식주는 물론 당연하게 포함이 되며, 종교 활동, 자신이 살아가는 일터 등 자신의 생활반경이 삶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패션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의복이 아닌 이외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치품으로 분류 하고 싶다.
이는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의복은 다시 언급하자면, 여인의 신발 같은 것이다.
그 이외의 패션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나 잉여재산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흐름이라면 이것은 어떤 의미로도 사회적으로 공헌한 바가 없다.
하지만 역사나 문화로는 ‘공헌’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해석’이 가능하며 경제의 흐름이나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이를 기반으로 -전문가는 아니지만-해석이 가능하다.
패션은 시대의 의상이라기에는 온 국민의 의복을 대변하지 못하며 왕족과 귀족의 유행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최초의 디자이너이자 쿠튀리에(Couturier)라고 알려진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 1825-1895)의 의복 또한 부를 대변하는 의복이었으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부를 대변하는 것이 그렇다면 나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부를 대변하는 것은 자본, 자유의 세상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를 나타내기 위한 의복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복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필요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살아감에 대한 기본요소인 의식주 혹은 개인의 삶의 반경에서 사치의 의복은 기본조건을 넘어선 무언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사치품이 영어로 무엇인가.
Luxury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그럼 어디서 왔는가?
라틴어인 luxus 온 것으로 확인이 된다.
이는 “사치”혹은 “과잉”을 의미한다.
[메리암웹스터(Merriam-Webster)사전]에 의하면, 프랑스 단어인 luxe가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부(Wealth, indulgence)’의 의미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억제되지 않은 성적 추구’를 의미하며 ‘음탕함이나 방탕함’과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설명한다.
[교양영어사전-강준만, 2013-]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하는데, 14세기 초에는 ‘성교(性交)’, 중반에는 ‘음탕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과 같은 의미는 17세기에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캠브리지(Cambridge)사전]에서는 luxury를 ‘특히 비싸고 아름다운 것들이 제공하는 큰 편안함’, ‘가지고 있으면 좋지만 필요하지 않은 비싼 물건’ 이라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해석하였을 때 ‘럭셔리’는 욕망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있기에 소비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둠과 고통에 우아라는 빛을 패션 안에서 선사하고자 노력한 위대한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 1905-1957)은 “우리의 문화는 사치이며, 우리는 그 존속을 위해 싸운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발언을 보고 우아의 위대한 창조자 또한 ‘사치의 불필요성을 인지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돌아가 예술의 관점에서 패션을 바라보도록 하자.
의복은 –혹은 패션은- ‘창조’이다.
세상에-자연에- 없는 것이며, 자연을 빌려 인간의 손으로 만드는 무언가이다.
이는 예술의 본질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
예술은 그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예술은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인물은 관찰자로서 예술 밖에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패션은 어떠한가.
‘패션은 예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이를 보자면 인간은 패션 밖이 아닌 안에 존재하게 된다.
건축, 회화, 조각 같은 것과는 달리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나, 무용이나 연기를 하는 배우와 같은 ‘행위자’로 존재한다.
하지만 행위자의 가치로 다른 것이 있다.
행위자는 작품 안에서 작품의 일부분으로 이행한다.
비디오게임은 어떠한가?
비디오게임은 ‘나’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행위자-캐릭터-가 게임 안에 존재한다.
개인은 ‘참여’의 형태로 게임과 공존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구성과 구상은 개발자의 의도이다.
개인은 음악이나 무용 그리고 연기와 같은 ‘전문인’이 아니며, 해당의 컨텐츠 밖에 존재하게 된다.
만약 게임 안에 이들과 같은 ‘전문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나’는 내가 아닌 게임 내의 ‘캐릭터’로 존재하여야한다.
그리고 덧붙여, 게임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상태로 존재한다.
패션은 어떠한가?
의복 안에 인간은 행위자로 존재한다.
의복의 본질은 ‘입힘’이다.
입히지 않는 의복을 의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판단한다.
그것은 용도를 해석할 수 없으며, 존재의 의의를 부여할 수 없다.
이 안에서 우리는 행위자인가 혹은 관찰자인가.
이는 게임과 상당히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게임은 <게임-캐릭터-개인>으로 작동하지만, 패션은 <의복-개인>으로 작동한다.
예술과 맞닿아 있으려면 개인은 행위자가 되어야 하는데, 행위에 있어 정당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관찰자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행위자인 ‘예술가’이다.’라는 해석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패션은 ‘참여예술’이라는 개념이 옳게 작동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우리가 예술가라면 혹은 예술이 우리의 행위에 있어 완성되는 참여예술이라면 옷을 입는 행위는 예술인가? 혹은 삶은 예술인가?
이것은 옳지 않는 방향성이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의 패션은 사치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명품을 왜 ‘Luxury Brand’라 부르는가.
럭셔리 브랜드는 패션을 선도하기에 그곳에서 펼쳐져 나가는 가지들은 사치에 기반을 하고 있으며 이는 유행이라고도 논리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의복은 포괄적인 ‘패션’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현대의 패션이라는 것은 과거-1930년대 이전의-의 패션과는 무척이나 다르고 이 안에 위치하는 남성복의 위치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남성이 검소함을 추구하는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다시금 우아함을 쫓는 시대가 찾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딜레마를 마주해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 클래식 남성복의 시작은 검소와 삶이다.
삶에 기인하여 탄생하였고 검소하려 노력한 결과물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삶이지 현대의 삶이 아니다.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현대의 삶은 과거와 너무나도 다르며 원단의 위대한 진화 또한 이룩하였다.
과거와 같이 데님을 입고 광산에 들어가지 않으며, 피셔맨 니트를 입고 바다로 나가지도 않는다.
이 안에서 남성들은 길을 잃었으며 이러한 의복들은 삶이 아닌 패션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의복의 특징은 ‘삶’과 함께 했기에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입음으로 잊혀지며 잊혀짐안에서 제 용도를 한다.
따라서 유행이라는 것에서 멀다.
유행은 거대자본이 만들어내는 럭셔리라는 단어에 부합한 것이다.
유행에 지치면 삶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클래식 의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을 입으며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며, 시장에서 이들은 스나이더(C. R. Snyder)와 프롬킨(Howard L. Fromkin)이 1980년에 이야기한 독창성 이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독창성 이론이란 ‘규범을 따름으로 일치감과 소속감을 추구하는 동시에, 남과 다른 ‘독특한 개인’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특징을 나타내며 표현하는 것 자체에 이미 패션이다.
이것이 두 번째 딜레마이다.
현재의 클래식 남성복은 완벽히 ‘패션’이라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필요함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어지는 댄디와도 같은 클래식 의복도 있다.
이것이 세 번째 딜레마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 과거의 삶과 현대의 삶이 같을 수 없고 인간의 본성으로 일어난 결과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과거의 유산은 현대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남성들이 남성의 삶을 잊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의복의 가치를 삶에 두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감사하게도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고결하고 숭고한 ‘삶’이 물론 과거와는 같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와 같은 마음가짐과 희생으로 패션과 럭셔리라는 이름하에 붕괴되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는 남성복의 본질을 패션 혹은 오래된 골동품정도로 치부하겠지만, 남성복의 본질은 남성의 삶에 있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다.
“패션은 무엇을 했는가?”
앞서 긴 설명으로 내린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패션은 럭셔리로 시작했기에 여태 럭셔리이며 럭셔리했으며 시대의 취향과 개성을 나타내었다.
몇몇 위대한 클래식 남성복 전문가들이 패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패션이라는 단어가 가진 포괄성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바르베(Jules Barbey d’Aurevilly, 1808-1889)가 브러멜을 패션이라는 작은 렌즈를 통해 해석하지 말라 경고했듯이, 남성복 또한 패션이라는 작은 렌즈를 통하여 해석하면 안 된다.
패션이라는 렌즈로 보 브러멜을 바라보면 그가 이룩한 계층의 통합과도 같은 의복적 혁명이 보이지 않고 그의 스타일만 보이듯, 패션을 통하여 클래식 남성복을 바라보게 되면 삶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패션이 아니며, 사치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삶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삶을 입으며, 삶 안에서 ‘입음’은 그저 잊혀질 뿐이고 의복은 그 안에서 자신의 용도를 할 뿐이다.
남자의 옷장은 과거부터 삶이었으며, 그것이 ‘입음’이고 본질이다.
* 이 글 등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썸네일 이미지 : Il Giudizio Universale(1536-1541), Michelangelo Buonarroti. 출처 : Wikipedia -Giudizio universale (Michelangelo)
이 회화안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을 그 의미로.
01OCT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