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해석하는 멋과 남성복
*아래 글의 ‘남성복’이라는 단어는 ‘클래식 남성복’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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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간다.
삶이란 살아감이다.
살아감은 그럼 무엇인가.
역설적으로 죽어감이라고 보고 싶기도 하다.
많은 인간은 늙어감에 따라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삶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죽음을 더 인식한다.
타인의 태어남은 인식하지만, 자신의 태어남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의 죽음도 인식하고 자신의 죽음도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태어나며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절대 진리는 ‘나는 죽는다.’이다.
인간의 교만과 오만으로의 존재 욕망에 비해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의 진리이지 않나 싶다.
결과적으로 삶이란 인간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진리로의 발걸음이다.
인간은 그 발걸음 속에 자유로울 수 있나?
그 진리가 주는 공포와 맨발로 걸어가는 긴 여행의 발걸음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나?
삶이란 결국 ‘고통 안에서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기다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죽어감을 향해가는 입장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떠한 것을 찾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그곳에 옷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간은 지구에 위치한다.
지구는 무엇을 품는가?
지구는 자연을 그리고 이 세상의 흐름을 품는다.
지구는 거대하며 자애롭다.
지구는 다양한 생명을 잉태하고 또 키운다.
생명은 그 안에서 공존한다.
이렇듯 지구는 땅의 여신을 가이아를 어머니라 칭했듯 어머니와 같다.
이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인식한 이 땅과 지구에 대한 하나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에 어머니라 칭했던 그 지구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공존을 잊은 채, 빌려 쓰는 것조차 잊은 채 교만하고 오만하다.
욕망은 삶을 윤택하게 하며 더욱 나은–오직 인간에게만-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자연의 도덕은 파괴되었다.
인간은 인간답기 위해, 자연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도덕을 갖췄다.
하지만 그 도덕은 모든 곳에 선하게 작용을 하는가?
도덕은 상식이 되었으며 일종의 규율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선함을 좇으며 세상에 작용한다.
선함이란 모두에게 ‘선함’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인간의 도덕은 인간에게 그렇게 작용했을지 모르겠지만, 자연의 도덕에서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리고 인간에게 악하다고 생각될지라도 그 모든 것에 작용하는 도덕은 ‘진리’라 칭하고싶다.
앞서 유일한 진리라고 말한 것은 모든 생물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선함’이라고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입장으로는 그것이 선할 수 있다.
진리란 이렇듯 추상적으로만 잡히는 무언가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그 진리들 안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은 옳은가?
진리라는 것은 인간보다 수 차원 위의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알고자 발버둥 친다고 하더라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사고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진리란 앞서 말한 듯 도덕의 정점이다.
따라서 선하다.
선함을 고민하고 좇는 것은, 그 답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행위 자체가 선하다.
또한 인간의 입에서 진리의 답이 나올 수는 없어도 진리가 인도하는 길은 걸을 수 있다.
진리가 인도하는 길은 선하며 이 세상의 이치이자 규율이기에 옳다.
옳음을 좇으며 그 규율 안에서는 자유하다.
옳음을 좇으며 옳음을 행하려 노력하고 옳음을 사고하고자 하는데 그 안에서는 그 어떤 악함도 존재할 수 없고 자유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악함 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서는 악함의 자유는 자유할 수 없다.
행위의 자유와 결과의 자유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오로지 진리 안에서만이 행위와 결과의 자유가 같으며 자유하다.
삶은 진리 안에 존재한다.
개인이 그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진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이치이다.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며 갖는 또 다른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존이다.
공존은 같이 존재하며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잊은 듯하다.
이 세상은 누군가가 무엇을 잃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얻으려고만 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는 무조건 잃도록 되어있다.
인간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짐에 따라 인간의 삶에 이득될 것 밖에 없으니 잃는 것은 자연이다.
인간이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생산해야 하는데 그 재료들은 어디서 오는가?
자연이 아니면 그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생물, 화학적으로 생산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들 또한 자연에서 추출한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없이 그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다.
음식, 건축, 의복 더 넘어서는 숨을 쉬게 하는 공기까지도 자연의 것이다.
인간은 자연 없이는 무력하며 자유하지 못하다.
인간이 자연 없이 존속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을 너무나 많이 파괴시켰다.
이 글은 회귀와 환경론적인 글은 아니다.
그저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할 뿐이다.
인간의 욕심과 교만은 자연의 것을 빼앗으며 균형을 깨뜨렸다.
그에 대한 결과는 지금의 자연현상들로 –전문가는 아니지만-설명 가능하지 않나 싶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해 그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도덕은 인간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나?
앞서서는 자연의 도덕을 이야기하였다면 이번은 인간의 도덕을 이야기하고 싶다.
자연의 도덕이 아닌 인간의 도덕은 선함 속에서 규율이자 상식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근간이며 암묵적인 규율이다.
이것을 지키기에 인간은 존속할 수 있으며, ‘인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도덕을 지키며 규율 안에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위대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이 존재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부수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법을 만들고 그 법 또한 선함을 추구하며 도덕 안에 적혔다.
자신들의 사회에 법이라는 도덕으로 구축을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듯 –실제로는 불분명하지만-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법은 절대적으로 선하지 못하였다.
이 또한 인간의 나약함이 아닌가?
인간의 나약함은 겸손한가?
나약함을 숨기고자 오히려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앞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공격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이 무서워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생겼고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자연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에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
자연재해 앞에서도, 병마 앞에서도 심지어는 자신의 감정 앞에서도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이 나약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열등감을 표명하지는 않는다.
자연 안에서 열등한 것은 없다.
각자의 위치에 각자의 역할을 하며 그 의미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열등감으로 표출되어 분노 혹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의 눈을 가린다.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
이것들에 대한 결과는 선함으로 표출되기 어렵다.
선함으로 표출되기 어렵다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공존에 무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열등감이 타인에게 도덕을 반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지만은 않는다.
열등감은 자신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열등감이란 타인과 자신을 향한, 욕망을 통한 비교분석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앞서 말한 전자의 열등감은 세상에 대한 열등감이고 후자는 타인에 대한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비교분석에서 온다고 했는데, 이것은 옳은 방향성인가 한다면 선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한 번 의견을 반복하자면, 전자는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을 갉아먹을 수 있다.
물론 열등감은 자신의 성장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도 있으나 그것이 자신이 가진 그릇 밖으로 넘치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진다.
어찌 본다면 우울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욕망도 열등감도 그렇다.
자연의 동물들은, 수컷들은 강하고자한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집단의 우두머리와 싸워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사랑을 위해 싸워 사랑을 차지하고자한다.
승부란 승자와 패자가 있고 자연의 수컷들은 패자가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떠나거나 또 다시 도전을 한다.
이 욕망과 열등감은 계속된 싸움을 만들며, 최후의 패자는 열등감 속에 사회에서 멀어져 죽게 된다.
우울하기 이전에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이다.
이러한 기저로 사고했을 때 행복이란 절대 기본값이 아니다.
삶은 행복함 속에만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이 욕망과 열등감 그리고 비공존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진리에 가까운 것을 표명할 수 없다.
행복 또한 항상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좇는 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살아감에 있어 행복은 분명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나약하기에 행복은 존재한다.
이것이 교만이 아닌 받아들임과 공존을 택했을 때 행복은 무심코 다가온다.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알지 못하는 진리에 나를 던졌을 때, 그때만이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다.
그것이 중요한가?
과거의 유명했던 이름도 그저 이름일 뿐이다.
인간은 이름 없이 태어나 죽는다.
그러나 죽을 때는 이름으로 죽는다.
이름은 남기는 것이 아닌 남겨질 때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나의 의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자신이 남기는 것이 아닌 타인이 남기는 것이다.
개인의 이름을 가장 처음 부르고 그것을 짓는 이는 누구인가?
부모이다.
인간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아주 자연적인 진리이자 도덕인 것은 자식이다.
다른 기술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자신이 남기는 것이나 타인이 평가하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이유 있는 남김이나, 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그것이 이유 있는 남김으로 개인의 죽음 뒤 죽은 개인의 영향하에 남을 수 있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식은 다르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존재가 자식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자식이다.
인간은 그 고결성을 이름에 대입하여 자식에게 선사한다.
자식은 ‘나’로 끝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쌓아왔고, 다시 쌓아갈 존재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 또한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고 ‘나’는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이는 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이 자신과 관련된 것으로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인간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진정하며 유일한 진실된 사랑의 형상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라지고 남겨지는 것에게 가르침을 선사한다.
가르침은 옳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가르침에서 변함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에 가까운 도덕적이며 선한 것이고 ‘나’의 분신에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평생의 삶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나’로 끝나는, ‘나’의 자식으로 끝나는 그런 문제가 절대 아니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또 무엇을 남길 수 있나?
인간이 남길 수 있는 재화나 이름값의 경우는 몇 세대 뒤면 그저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옳은 가르침은 자식의 삶뿐 아니라 그 이후 자식에게도 계속된 가르침으로 남는다.
또한 ‘나’의 DNA도 남는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는다.
그 가치보다 위대한 것을 개인이 남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연의 도덕은 인간의 도덕을 그렇게 포용한다.
인류의 역사를 보게 되면 수많은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적힌 이름에 의해 이어져 오지 않았다.
전쟁을 하더라도 적히지 않은 이름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고, 가정을 이루어도 남겨지지 않은 이름으로 남긴 사람이 많다.
세상은 적히지 않은 이름들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적히지 않은 이름들이 남긴 많은 것은 현재의 인류 사회를 구축했고, 인간들 서로 규율 속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도록 적응해왔다.
인간은 그 거대한 흐름 속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잠시 왔다가는 그런 순간의 존재들이다.
삶은 그렇기에 적막하며 시끌벅적하고, 시끌벅적하며 적막하다.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누구나 욕망하게 된다.
욕망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갈망이며 욕심이다.
삶은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집착하면 자신은 불행해진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욕망은 욕심에 기반하며 이루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것이 진심이더라도 그러하다.
또한 욕망은 일종의 망상이며 일확천금과 같다.
개인적인 사랑도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욕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인간은 희망이라는 선한 형태를 갖을 수 있다.
욕망과 희망 모두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지만 이는 본질이 다르다.
욕망이 악이라면 희망은 선이다.
욕망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지만 희망은 그렇지 않다.
욕망은 욕망만을 좇게 하지만 희망은 희망을 원하게 된다.
욕망은 시작점에 있지만 희망은 종착점에 있다.
욕망은 명확하나 희망은 모호하다.
욕망은 욕망만 바라보게 만들며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희망은 상황 안에서 빛을 찾게 한다,
욕망은 무언가를 취하기 위한 것이지만 희망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도중에 그것이 잘 되길 바란다는 결과에 치중된다.
다시 말해 희망은 노력 중 결과나 발걸음이 좋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고통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선하게 파생된다.
더하여 인생이 모호한 것처럼 희망 또한 모호하기에 결이 맞다.
삶 안에 그리고 인간이 모르는 수많은 진리 속에,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과 욕망 속에 도대체 옷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한가?
먼저 거대한,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진리를 통해 옷을 해석해야 한다.
거대한 진리의 흐름 속에 인간은 옷을 입기로 선택된 것이라 판단한다.
자연의 모든 피조물 중 옷을 입기로 선택된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옷을 입기 위해 자연을 빌렸으며 자연의 것을 기술적으로 발전시켜 계절과 상황에 맞게 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옷의 생김새는 인간이 창조했지만 생김새만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료가 없다면 물건을 만들지 못하는 것 같이 말이다.
인간은 옷을 만들기 위해 자연의 많은 것들을 빌려오며 공존의 형태를 띠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의 털과 식물의 줄기 등을 빌려 도안만 존재할 수 있었던 옷을 만들었다.
이는 자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인간 또한 자연에 속한 것이기에 그 결이 맞아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주는 선물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척박한 환경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자연 없이는 자연에 녹아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며 살아남기도 힘든 존재들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가 말하는 도덕 중 자연에서의 공존이 있다고 앞서 말했다.
옷을 입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을 빌려 입는다는 것은 진리 안에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행위이다.
물론 그것이 ‘착취’가 되었을 때는 욕망이기에 도덕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그저 주는 만큼만 겸허히 사용하면 된다.
그것이 공존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필요한 만큼 가축을 기르고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로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섭리 안에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필요 이상이거나 욕망만을 위한 것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의 죽음이 인간의 삶을 책임지는데 인간은 그 죽음에 조금 더 겸허할 필요가 있다.
인간 또한 죽는데, 인간은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나?
물론 책임지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잊었을 땐 어쩌면 인간은 인간이 교만에 칭하는 미물이라는 존재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현재의 사회는 물질이 넘친다.
옷 또한 필요 이상의 것들이 넘쳐나며 그것들은 환경을 파괴시킨다.
무엇이 그런 흐름을 가져왔나 생각한다면 욕망과 돈으로 점철되는 패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패션이라는 것이 대량 생산되고 그 안에 큰 재화가 돌기 시작하며 옷이 가진 도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필요 이상의 것이 창궐함은 물론이고 패션 회사들은 무한한 재화의 탐닉을 위하여 유행을 계속하여 변화시키며 탐한다.
계속되는 유행의 변화 속에서는 도덕도 그리고 규율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도덕과 규율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어떤 것이 선보여 충분히 소화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되기도 전에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 다시금 선보인다.
이 말인즉 옷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인간에게 사고할 시간도 주지 못하며-물론 도덕과 사회 그리고 인문학에 대해서도 사회에서는 인간에게 충분한 사고의 시간을 주지 않지만- 도덕과 규율을 생산해내지도 더불어 좇지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쌓아 남겨진 도덕이 남은, 규율이 남은 남성복은 귀하다.
자신이 도덕과 규율을 입지 못하는데 어찌 세상에 도덕과 규율이 존재할 수 있겠나?
현시대는 인간에게 사고할 시간도 비판할 시간도 주지 않으며 이는 옷에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함을 추구하기에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도덕과 규율은 선하다.
하지만 그것은 행동으로 발현이 되었을 때나 선하게 작용하는 것이지 글이나 생각으로만 존재한다면 악한 것과 진배없다.
남성복은 현대 원단 기술의 발전 이전부터 오랜 시간 존재했기에 자연에서 구해 자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공존에 가장 큰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옷 중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래 사고되어 정착되고 그것이 오랜 시간 남성들에게, 더 나아가 사회에 인정을 받은 것들이기에 살아남아 즐겨지는 것이라 판단하고 그렇기에 더욱이 도덕적이라 판단한다.
더하여 남성복은 규율에 존재한다.-규율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 다루도록 하겠다-
규율이란 도덕에 근접하며 도덕은 인간의 진리에 근접하다.
즉 선함에 근접한 옷이며 이를 제대로 된 규율 안에 입는다는 것은 선함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멋’이라는 것이 욕망과 함께 섞여 들어온다면 이는 장담하기 힘들다.
멋은 욕망에서 피어난다.
기본적으로 통상적인 멋은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뽐내는 것이다.
인간은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이 따라오지 못할 재화를 투자한다거나, 특별한 것들에 투자를 한다.
거대한 자본과 시장의 흐름에서 봤을 때는 이것은 옳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멋있냐 묻는다면 의문을 던지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투자된 것은 대부분 순간에 가까운 것들이다.
고급 브랜드의 순간을 위해 생산된 것이거나,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가치가 사라질 것들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보석은 다르지 않나?”
맞다.
보석은 다르다.
보석은 영원에 가까우며 개인의 삶보다 더 오랜 삶을 향유할 수 있으며 자식에게도 그것이 전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보석은 인간의 삶의 향유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인가?”
장담컨데 필요 없을 가능성이 무척 농후하다.
보석은 아름답지만 삶의 향유에 있어 그 어떤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저 ‘멋’이라는 욕망 아래 거대한 재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돌덩이일 뿐이다.
그 돌덩이는 너무나 하찮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돌덩이를 탐한다.
그리고 남의 돌덩이와 비교하며 행복을 잃으며 상실감에 빠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며 우월감에 빠지기도 한다.-이것은 교만이 낳은 불행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격정적이고 선에서 멀어져만 가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에 인간은 눈이 멀어 탐한다.-어찌 본다면 인간은 탐에도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이것은 보석에 빗댄 하나의 예일 뿐이지 인간은 잊히는 혹은 사라지는–옷을 포함한- 많은 것들에도 무한히 탐한다.
무한히 탐하지 않는다면 이미 패션 회사들은, 특히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미 줄줄이 도산했을 것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인간의 탐을 교묘히 이용하여 계속되는 탐을 제공한다.
이는 유행의 변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유행의 변화 속에서 규율과 도덕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유행과 소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옷인가?
인간은 옷을 위해 소비하는 것인가?
결국엔 욕망을 위해 소비하며 욕망을 탐하는 것이 아닌가?
그 탐을 끊어낼 수 없다면 인간은 탐의 무한한 굴레 속으로 빠져 끝없는 욕망의 물레방아를 돌리며 자신을 갉아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탐을 잊는 순간 무한히 자유롭다.
사설이 길었지만, 다시 멋을 보도록 하자.
앞서 남성복은 욕망과 멀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욕망의 멋과는 다른 이야기로 남성복의 멋을 설명해야만 한다.
탐의 굴레에서 멋은 그저 여러 형태의 욕망이다.
그러나 멋은 분명히 추상적이나 존재한다.
인간은 그것을 분명히 느끼며 판단한다.
욕망이 멋진 것이라면 그것이 진정으로 멋지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비단 럭셔리 브랜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클래식-남성복에서 더욱 위험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남성복은 현재 주류가 아니다.
패션시장의 잠식에 남성복의 입지는 이어온 역사와 가치 그리고 도덕과 규율에 비해 처참하다.
앞서 멋이란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을 찾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보다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이 어디 있나.
주류가 아님에도 과거 펑크나 히피와 달리 단정하며, 유구한 역사와 가치가 존재하기에 남들과는 달라 보이기도 하고 지식의 자랑마저 할 수 있으니 말은 다 했다.
그러므로 이 또한 욕망의 멋으로 입히고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남성복의 멋을 해석해야 하나.
남성복은 역사가 있다.
수트나 많은 코트 그리고 클래식으로 남은 많은 전쟁 의류 등등 남성복으로 남은 많은 것들은 역사가 존재하며, 그 역사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고 수많은 이름 모를 남성들이 존재한다.
더하여 그것들은 남겨지지 않은 이름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렇게 창조된 남성복들은 남성의 삶이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며 멋이 아닌 그 자리에 맞게 존재해온 그런 의미가 있는 옷들이다.
따라서 남성복은 자신의 증명이며 삶에 대한 증명으로 개인들에게 존재해왔다.
개인의 삶을 책임감으로 자신의 터전에서 살아간 남성들은 세상의 구성으로, 자연의 구성으로 세상을 이어왔다.
자연의 구성으로의 책임감과 살아감의 책임감 하에 입힌 남성복은 욕망이란 것에서 먼 그저 옷 자체의 본질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남성들은 오랜 시간 본질을 입어왔으며 살아갔다.
진정한 멋은 그들의 삶에 합일이 되어 입힌 그 옷들에서 찾고싶다.
삶의 합일에는 비단 삶뿐만이 아니라 철학의 합일이라는 의미도 존재한다.
삶을 살아감에는 많은 배움과 가치관의 형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며 옷에도 표현이 된다.
옷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증명이자 삶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피력하고 싶은 진정한 멋이란, 옷 자체가 아닌 나 자신과의 합일에서 나오는 아우라이다.
남성복의 삶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남성복은 삶과 관련이 되어있다.
과거에는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하는 일종의 가업 형태가 많이금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물건’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삶이 같다면 삶의 연장이 된다는 의미이며 그 안에 물건을 물려줬을 때 옷과 인간의 합일 또한 이어졌다고 해석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도리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삶은 나의 본질에 대한 시작이고, 개인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으며 부모의 존재는 이에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넘어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변화가 없는 가치와 먼저의 삶을 받는 것은 그만큼 위대한 일이다.
이렇듯 개인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흐름에 존재하는 것이 삶이라면 굳이 공포를 느낄 이유도 없다.
인간은 죽음 앞에 절대 나약하지 않다.
분명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절대 진리라면 인간은 받는 것과 남길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그것을 악함과 먼 진리에 가까운 선함과 사랑으로 가꾸어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의 가치를 훼손치 않으며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진리 속에서 선함으로 살아남게 할 것이다.
진리 속에서 인간이란 자유로우며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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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Unseen Histories
02FEB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