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의미
‘옷이란?’
그 본질을 찾기 위하여 수없이 던져왔고, 또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옷이란 결국에 현대사회에서 돈이다.
SPA를 구매하건, 시장에서 구매하건, 이름 없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하건, 럭셔리 브랜드를 구매하건, 클래식을 구매하건 결국에는 숫자로 점철되는 돈의 다른 모습을 구매하는 본질에는 다를 바가 없다.
더하여, 개인의 사상을 옷에 아무리 부여해서 합리화를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돈의 형상을 띄고 있는 것이 의복이다.
그 어떤 역사적 의의도, 환경적 의의도 혹은 다른 어떠한 위대한 의의도 결국에는 돈 앞에 무력하다.
돈이 주는 위험성은 분명히 있다.
돈의 크기로 그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그것이다.
돈의 크기로 모든 것이 판단 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가치가 치부되기 쉽다.
그리고 그것보다 걱정인 것은 의복이 가진 돈의 크기가 크다보면 그것의 주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비싼 것’이라는 개념이 생긴다면 개인은 그것을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물건을 아낀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개인보다 높게 위치한다면 개인의 존재의의는 색이 흐려지고 만다.
개인이 물건의 가치를 자신보다 높게 책정할 때는 그것은 더 이상 물건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소비는 옷에 있어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나?
돈은 어떻게 뿌리쳐져야만 하나?
그 본질을 타파할 수 있나?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옷의 의미와 더불어 시장이 옷에 제시하는 돈의 해석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옷의 기본적 본질이란 개인의 몸을 가리는 것이다.
그 이상의 혹은 그 이하의 의의는 없다.
개인의 표현 문제는 이 기본적 원칙이 성립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옷은 그렇게 존재하지 못했다.
사실 옷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존재하지 못했다.
옷과 다양한 것들은 사치로 존재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 2000)의 –결말의 스포일러는 아닌-한 장면을 살펴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재밌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성공한 주인공과 그 친구-혹은 동료-들은 명함 한 장을 들고 서로 기싸움을 하거나 유명 식당의 예약 하나로 질투를 한다.
이것은 현 사회의 옷을 바라보고 즐기는 사람들의 시선과 비슷하다.
옷은 사치품으로 존재하며, 삶에 녹아들지 못한다.
그저 개인이 무엇을 입고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고뇌한다.
이것은 명함을 뽐내고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 그것과 진배없다.
이것은 무엇을 충족시키는 것인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사용한 단어를 빌리자면 정신적 향락이 아닌 관능적 향락을 추구하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렇다고 관능적 향락을 향한 사치는 완벽히 악한 것인가?
그것은 명징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이것은 기본만 하면 되는 것이며 그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어떠한 합당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사회는 잉여 자산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통해 의식주에 사치를 더하였다.
이러한 사치는 문화의 탄생과 지식의 갈망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약에 이러한 것들을 갈망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1차 산업 그 이상의 것을 할 이유와 의무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먹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집이 있으며, 대충 몸만을 가릴 옷이 있는데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인간은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 희귀한 것들을 갈망했고 그것은 인류의 문화와 지식 그리고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기에 완벽히 악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문화와 지식 그리고 기술을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해보도록 하자.
문화와 지식 그리고 기술은 전 세계에 일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 지역에, 그곳에 맞춰 발생한다.
이는 무슨 의미냐면, 이들은 지역의 색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기반이 되는 지식의 경우에는 수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 등 여러 방면의 문화적, 인문학적 태동을 살펴봐야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지식이 아닌 일상의 지식을 다루고자 한다.
문화와 문명를 태동시키기 위해선 철학, 언어, 정치 등이 물론 중요하지만, 무형의 것이 아닌 유형의 것을 창조시키기 위해서는 기술이 중요하다.
기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지식과 행동의 합일과 그의 진화들로 태동된다.
기술은 무언가를 구조화시킬 수 있다.
‘옷을 만드는 것’.
이것 또한 기술이다.
인류는 처음부터 옷을 만들 수 있었나?
그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는 처음에 무엇을 가려야 하는지 고민했을 것이고 그다음은 어떤 날씨엔 어떤 것을 입어야 하는지, 그것은 또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원단을 어떻게 가공해야 하는지 등의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지식을 쌓아 기술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자신들이 정착한 곳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문화와 기술은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이다.
‘옷’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논리를 조금 더 펼쳐보고자 한다.
‘교역품’ 혹은 ‘약탈품’이라는 개념을 제외한다면 물건은 그 지역에서 나는 것으로 생산이 된다.
그것은 자연에서 가져오는 것일 수도 있고, 인류가 필요로 인해 가축을 사육하거나 식물을 기르는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가축과 식물은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해당 기후에 맞는 가축과 식물을 기를 수밖에 없으며 야생의 것도 그 지역의 기후로 존재한다.
옷은 그것의 부산물로 이루어진다.
가죽과 털 혹은 식물의 줄기 목화의 솜 등이 그것이다.
결국에 그것을 통해 기본이 되는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렇듯 옷은 그 지역의 자연에서 빌려와 인간의 손을 거쳐 무언가가 만들어졌고, 기후로 자란 것들의 부산물을 기반으로 그 지역에 입혔다.
사치로의 진화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문화가 태동되려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문명이다.
원시의 부족사회의 경우에도 물론 사치품은 존재했겠지만, 그것은 해당 부족에게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 샤머니즘적으로나 계급적으로만 존재했으며 기술적으로 부족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부족이 뭉치고 도시가 탄생하고 문명이 탄생함에, 계급은 더욱 확실해지고 부의 개념은 더욱 확실시됨에 따라 시장과 경제 그리고 무역이 활성화되고 지역에서 생산되던 것들은 계속된 진화를 거듭하며 부의 척도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들은 계속된 진화를 거쳐 지역 문화의 색을 띠며 더욱 화려해지고 귀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며 물건이 필요 혹은 사치와 함께 진화하게 된다면, 과거의 것은 사라지나?
사라지는 것들도 당연히 있지만 남는 것도 당연히 있다.
어떠한 물건이 그 이상의 발전이 필요하지 않다던가, 지리적 요건에 부합 하다거나 등등의 이유로 오랜 시간 남기도 한다.
물론 이들 또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시간이 유행과 같이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오랜 시간을 향유하는 것들은 상식으로 남으며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화로 자리 잡는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듯 변한다.
예를 들자면 셔츠의 원형인, 기원전 3000년부터 이집트에서 입히던 튜닉(Tunic)이나 고대 로마에서 입히던 수부쿨라(Sububula)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속옷으로 인간에게 입혔다.
또한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와 지역에서 그리고 여러 계급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치와 일상으로 그 형태가 변형됐지만, 결론적으로 현재 전세계를 관통하는 한 형태의 셔츠라는 모습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수부쿨라와 같이 옷은 각 계급에서 오랜 시간과 문화를 지남에 절대다수가 사용하며 변형을 거쳤지만, 계급이 사라지며 그 중간을 찾는 어느 형태로 합일점을 찾으며 진화했다.
현재 남성이 구매하는 옷이란, 이때 형태가 남은 옷이거나 계급이 사라진 이후 인류의 역사와 환경 혹은 삶에 의해 형태가 생긴 것이며 문화로 남았다.
어떤 옷이 하나의 문화가 된다면 그것은 상식이 된다.
우리는 상식을 입는다.
앞서 설명한 형태가 남은 의복은 현재도 많은 변화의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회사들에 의해 그 형태가 변화하며 소개가 된다.
이 옷들은 수명이 짧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는 필요하다.
과거의 사치가 형태의 변형을 가져왔듯, 패션산업에 의해 창조되는 수많은 형태는 변형을 가져오고 이것이 또 미래에 어떠한 문화적 혁명을 통하여 고착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형태가 변형되어 고착된 옷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와 다른 점이 많다.
이에 따른 문제점은 현시점에 있어 아주 큰 문제가 된다.
환경문제가 그렇다.
과거와는 다른 대량생산 문제는 환경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대량생산은 더욱 많은 유행과 원단 그리고 회사들을 만들어내며 잉여 생산물을 세상에 남기고 있다.
이는 사치의 말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과거의 사치는 옳고 현재의 사치는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옷의 진화적 측면에서는 옳다.
하지만 현재의 사치는 과거의 사치만큼 사치가 사회에 녹아들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에서 내놓은 스타일이 유행한다면 가격을 떠난 수많은 회사에서 우후죽순으로 그 스타일을 복사해 세상에 내놓는다.
세상에 빠르게 퍼진 스타일은 금방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다른 스타일이 대두하여 이 굴레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원단과 옷은 어떻게 되는가?
버려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물론 현재 이를 막기 위해 많은 회사가 이를 재활용하거나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환경을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좋은 문화이다.
그러나 쏟아지는 새 상품들의 물량을 재소비 하기에는, 이는 시간도 회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줄이고자 한다면 재고의 재생산을 늘림과 동시에 새 상품의 생산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새 상품의 생산량은 형태가 변형된 옷과 맞닿아 있으니 이는 형태만 남은 옷으로 해결하지 않나 싶다.
결국에 형태가 변하지 않는 옷들은 현재 우리의 문화이다.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재소비의 굴레도 줄으니 환경적으로 그것이 선하다.
그것이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모습이라 판단한다.
인간은 세상에, 옷은 세상에 그렇게 구성된다.
옷은 그렇게 입히는 것이 선하다.
다시 돈으로 돌아가 보자.
돈.
어떻게 그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원초적으로 그 절대성 앞에 우리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상품을 사는데 재화가 드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현명해야 하는가?
돈 앞에 무력한 역사적 의의도, 환경적 의의도 혹은 다른 어떠한 위대한 의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재화와 상품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이에 위치해야 하는가?
돈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전세계를 관통하는 상식으로 이해되는 문화 안에 살아가기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의 시장은 형태만 남은 옷에 대하여 너무나 무관심한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쌓아온 문화에 대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고 해석한다.
옛것이라고 치부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현재의 우리이다.
과거부터 인간이 정의한 인간의 가치 표현이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지난 것을 버리며 새로움을 위한 돈의 무한한 굴레의 쓰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형태만 남은 옷은 어디서든 다르지 않다.
물론 그 안에서도 급은 나뉘겠지만, 표현하는 데 그리고 입히는 데 있어서 비슷하다.
계급 상관없이 형태만 남은 옷에 대한 결과물은 18세기부터 남성들이 해온 노력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에게 마카로니(Macaroni 혹은 Maccaroni, 18세기 유행을 쫓는 남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경멸적 용어)와 같은 과거 남성의 행적으로 돌아가, 역사의 도돌이표를 과거와 달리 광범위하게 제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을 강요하는 시장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새로운 것이 밀려오는 파도들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잔잔한 호수에서 평온한 것을 구할 수 있다.
바다는 파도로 형태가 변한다.
호수는 잔잔하며 형태가 온전하다.
그 온전함에, 인간이 오랜 시간 구축한 그 안정함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옷이 가진 의미이자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며 공존하는 의미이고 돈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옷과 인간은 자연과 상식 안에 상부상조의 관계이다.
옷은 입히지 않으면 그 의미가 없고, 인간은 입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 공존을 잘 조절해야 한다.
그 공존은 문화, 환경, 역사, 문명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있는 것이다.
옷은 그 안에 존재한다.
인간 또한 그 안에 존재한다.
둘 다 그 안에 시간의 쌓임으로 존재한다.
옷의 의미는 인간의 삶과 역사 그리고 이 지구에 그렇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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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DEC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