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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자의 옷장 Dec 08. 2022

사랑의 해석

욕망과 순수를 통한 사랑과 의복을 향한 발걸음

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제가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니지마는 오늘은 의복을 벗어나 조금은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사랑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의복을 마주하는 감정도 사랑이라 생각하기에 이는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사랑을 기저로 설명을 해보려 합니다.




최근은 쾌락의 시대이다.


자만추란 단어의 뜻을 알고 있는가?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보고 만남을 추구’로 바뀌었다.


이것을 쾌락의 시대라고 명명하지 않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이것이 다수를 표명하지는 않는다.


다수가 그 사회의 사회성을 대표하지만, 소수의 사회가 다수의 언론이나 방송에 노출이 됐음에도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 ‘단어’가 된다면 그 단어는 소수의 사회가 아닌 다수의 사회에서도 큰 힘을 갖게 된다.




자만추라는 두 가지 뜻의 결론은 ‘만남’이다.


이 두 가지의 만남을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좋음’과 ‘즐거움’이다.


좋음과 즐거움은 양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며 이는 상대도 인식을 해야만 한다.


여기는 시간이라는 개념도 들어간다.


좋음과 즐거움은 상대방이 나에게 주어야 함은 당연하고, 나도 상대에게 제공을 하며 이를 상대가 인식을 했을 때 이루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한다.


그렇기에 무생물과는 사랑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음과 즐거움을 선사하는가.


마광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관능적 경탄’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이란 시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 ‘좋아야’ 서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안에서 마광수는 연애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연애를 위한 연애’이고 다른 하나는‘진짜 사랑에 빠져서 하는 연애'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물론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관능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그 이후 그는 연애에 대한 설명을 이루는데, 그가 말하는 연애의 종결은 ‘삽입 성교’가 이루어질 때이다.


이는 사랑은 오롯이 ‘바라보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는 상대방과 이미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소유’의 개념을 이룩했기에 -마광수의 말로-  “‘군침 흘리며 바라보는 상태’를 유지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라고 설명된다.


여기서 우리는 좋음과 즐거움을 위장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관능적 경탄이란 그로써 충분히 좋음과 즐거움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성교라는 것 하나로 연애라는 것이 끝난다면, 그것은 욕망만이 존재하는 관계이다.


이는 자크 라캉이 이야기하는 ‘육체의 희열’이다.




라캉이 말하는 ‘오브제 아’가 마광수가 말하는 ‘관능적 경탄’과 비슷한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관능적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오브제 아’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이 ‘오브제 아’는 욕망의 원인으로, 사랑의 행위라고 설명한다.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욕구가 발생한다.


이 욕구는 -성행위를 중심으로- 도착적으로 나타나며, 욕구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구를 욕망하게 되고 이는 연쇄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는 끝나지 않으며 이를 종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라캉은 그렇게 말한다.




‘관능적 경탄’이나 ‘오브제 아’를 ‘미에 대한 인식’이라고 확장하고 싶다.


결국에 미라는 개념이 인식 되질 않는다면 경탄이 일어날 일도, 오브제 아가 될 일도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술의 개념이 아닌 -신의 창조물의 개념으로 예술이라 할 수도 있지만- 미, 즉 아름다움의 인식 개념으로 들여오겠다.


-뒤에 설명되는 말들은 예술에 관한 말들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해석을 하고자 하고 나의 말에는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인식이 되었음 한다.-


칸트의 경우에는 미에 대해 “미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데도 [무심하게 바라볼 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쇼펜하우어 또한 이에 동의하는 듯 “예술은 사람들을 사람들을 관조하는 상태에 빠지게 하면서 성욕을 비롯한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와 욕망에 의해서 내몰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의 수단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니체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니체의 미에 대한 인식은 성욕을 비롯한 욕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는 둘 다 맞는 말이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을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말하듯 이것은 누가 어떠한 위치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에 차이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찬성하는 것은 아닌- ’금욕주의자적 이상’은 옳은 것인가.


이것은 니체가 말한 ‘그리스도교인’ 즉 기독교인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선행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금욕주의자적 이상은 삶의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체스코>를 읽으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성직자가 아닌 이상 이를 실현시키기는 매우 불가능하다.


단어 그대로 욕망을 금해야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하듯 우리는 욕망을 생산하기에 금욕을 추구하기 매우 힘들다.


욕망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게 다가와 마음과 정신의 이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욕망의 충족이 일어났을 때는 쾌락적 행복을 선사받을 수 있다.


행복은 그럼 실존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은 일종의 허상이다.


행복을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대부분의 행복은 일시적 일어난 순간에 발생하고, 기억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감사하거나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 ‘행복’이라는 단어로 감정을 인식하고 이는 복합적인 어떤 것으로 자신에게 좋음과 즐거움이 일어난 순간을 의미한다.


그 순간은 쾌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순간의 도파민의 발산으로 발생한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그 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리움으로 작용하고 그와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욕망의 간구이자 자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라캉이 말한 욕망의 연쇄와 비슷한 모습을 띈다고 나는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쾌락적 행복의 추구는 욕망의 추구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에서 -위에서 말한 ‘오브제 아’- 욕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거나, 그것에 대한 도착(倒錯)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어 좋음과 즐거움이 발현되지 않을 때 다른 대상을 찾게 되며 이별이란 것이 발생한다.


이렇게 봤을 때 이별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이다.


좋음과 즐거움이 연쇄적으로 발현이 된다면 우리는 이별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성적인 욕구로 인한 좋음과 즐거움이고 우리가 그것만을 탐미한다면 그것은 이별을 위한 지름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욕망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사랑은 아니다.


물론 앞서 말한 욕망의 간구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이 앞선 것이 아닌 순수와 존재 자체로의 정결의 선행(先行)을 말하고 싶다.


사랑에는 무조건적으로 욕망이 발생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플라토닉적인 -정신적인- 사랑은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순수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온전하고 순전한 상태’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조건 없는 것과는 조금의 거리가 있다.


좋음과 즐거움이 어떠한 조건 -욕망-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서의 좋음과 즐거움이고 이것이 ‘오브제 아’가 되어야 한다.


그로 인해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사랑은 단테의 사랑이다.


단테의 사랑에서는 쾌락적 욕망이 사라진 순수한 사랑으로 이뤄지는 삶을 엿볼 수 있다.




진실한 해석과 다정한 배려를 위해,

   이 시의 언어들이 이제 전해질

   달콤한 고통이 요동치는 가슴 가슴마다,

사랑의 신인 우리 주의 이름으로 인사를 전하노라.

천공의 뭇별들이 깨어서 망을 보는 긴긴 시간의 가운데서,

   세 번째 시간이 거의 지났을 무렵에,

   사랑의 신이 무심결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내게 나타났다.

그는 기쁨에 가득 찬 사람처럼 보였고

   한 손에는 내 심장을 쥐고, 품에는

   망사를 덮고 잠든 내 여인을 안고 있었다.

그녀를 깨운 후에 그는 곧장 그녀로 하여금

   내 심장을 먹게 했다, 해(害)를 두려워하듯 겁에 질린 채.

   그리고 그는 떠났고, 가면서 울었다.


단테의 <새로운 인생>에 적힌 그의 시이다.


이 시는 꿈에서 그녀를 보고 적은 그의 시이고, 이 시를 지인에게 보여주었을 때 ‘구이도 카발칸티’는 “내 생각에 그대는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보았구려”라는 말로 운을 뗐다.


이렇듯 순수와 정결의 사랑은 가치 있는 것이다.




가치란 것은 좋음과 즐거움을 상회(上廻)한다.


그러나 이 문장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한데, 감가상각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이상적이다.


우리는 매일 같은 나이지만 다른 나를 살아간다.


매일이 바뀐다면 그 매일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감가상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맞추는 것이 아닌 매일의 다른 -고정-대상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장 실수하는 것은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문제 삼기에 사랑의 연장이 되질 않는다.


생각해보라.


나와 상대는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 자아가 형성되고, 다른 가정에서 자랐으며,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환경에 살아왔다.


그런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는 욕망은 나의 좋음과 편함을 쫓기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다.


개인의 인생을 2차원인 선으로 나타낸다면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순간은 내가 살아온 2차원의 선의 한 순간에서 탈선이 되어야 한다.


이는 나 자신이 아닌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둘의 만남은 새로운 시간의 2차원 선을 그려야 하며 새로운 틀 안에 새로이 맞춰져야 한다.


이는 순수한 새로운 것을 의미하며, 단테의 책 제목인 <새로운 인생>에 부합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구원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상대와의 하나의 개체로 각자가 살아온 것이 아닌 새로운 선을 그리는 일이다.


물론 사랑의 시작에 경탄이라는 단어를 빼고 싶지는 않다.


시작은 감정의 동요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동요에서 경탄을 빼놓으면 사랑의 불 붙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관능을 제외한 순수 경탄을 이야기하며, 이를 통한 감정의 동요가 -관능적인- 성적인 욕망의 연쇄작용으로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으로 종결이 되지만 책임이 들어올 경우 새로운 인생으로 발전이 된다.


앞서 말한 가치가 이 책임이 아닐까 싶다.


감정에 대한 책임, 상대에 대한 책임, 미래에 대한 책임 그 안에 내가 아닌 상대가 존재했을 때 나의 욕망이 아닌 상대의 존재를 책임지는 그런 행위가 가치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욕망의 행복이 아닌 순수와 도덕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오늘의 상대를 좋음과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내일의 상대를 좋음과 즐거움으로 인식하며 내일도 같은 상대a가 아닌 내일도 다른 상대a를 인식하며 그 존재를 사랑하여야 한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체스코>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과 기억으로-


프란체스코는 순례 중 어떤 남성은 다가와 대화를 나눈다.


그 남성은 프란체스코에게 그와 같이 순례길에 오르고자 하며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이를 거절하며, “이는 나와 같은 성직자만이 걸어가는 고통의 길로 당신은 상관이 없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가정을 이뤄 자식을 낳고 잘 키우는 것이 순례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순례는 사랑 안에서의 ‘인생’이자 ‘살아감’이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끝은 죽음이다.


하지만 나는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다.


기독교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본회퍼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이 글은 끝이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죽음이 아닌 생명의 쫓음과 그 안에서 생명의 잉태와 죽음이 끝이 아닌 생명의 연속과 연쇄성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비로소 개인이 이룩할 수 있는 사랑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금욕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잉태에는 우리가 욕구라 칭하는 성욕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단일 상대를 향한 깊은 욕망에 대한 책임만이 우리를 도덕과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이를 너무 불경 시 하면 안 된다.


옳은 욕망과 쾌락은 절대 죽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만추에 대한 단어를 마주해보자.


이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에 있는 욕망의 만남이다.


첫 질문인 ‘이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겠다.


그 이유는 위에 적힌 것과 같다.


우리는 그렇기에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쾌락의 시대에 죽음이 아닌 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대한 역설(力說)을 했다.


그에 따른 결론도 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의복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반기(反旗)를 들어보려 한다.


이는 사춘기 소년의 반항만큼 설레고 치기 어린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생물과 사랑이 불가하다고 했다.


이는 쌍방향으로 좋음과 즐거움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가 없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말한 욕망의 추구가 아닌 생명과 삶의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을 가정을 한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옷을 구매할 때나 입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욕망으로 구매를 한다.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꼭 필요에 의한 구매가 아닌 이상 이는 욕망이다.


심지어 필요에 의한 구매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려 애쓴다.


경탄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아름다운 의복’을 보았을 때 의복 단일 개체로 소비를 해버린다.


이는 욕망의 연쇄작용으로 이 작용은 말 그대로 재화의 탕진이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끝나게 된다.




의복 단일 개체로의 소비는 순간의 좋음과 즐거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고 더욱 나은 가치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재화로의 가치를 잇는 소비였다면 그것은 내 옷장에서 신격화될 수밖에 없다.


재화에서의 보상심리와 우월주의에 빠진 개체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하지 않은 모습을 띄는 개체가 되어버린다.


또한 이를 ‘오브제 아’라고 부를 수 있다.


‘오브제 아’를 통한 욕망의 희열은 다른 ‘오브제 아’로 옮겨 갈 수밖에 없는 욕망의 속삭임이 있으며 그것을 탐닉하기 위해 인간은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형 브랜드들과 디자이너들이 추구하는 패션의 세상은 ‘오브제 아’의 변화를 촉진시키기에 욕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연쇄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욕망의 연쇄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끊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한다.




의복은 어떠해야 하나.


그 자체로 순수해야 한다.


이는 삶과 생명을 의미한다.


의복을 구매할 때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욕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서 벗어나 ‘나 = 의복’이 되는 순간을 이해해보자.


나 자신과 의복 자신이 하나의 개체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다.


결국 의복은 나이고 나는 의복이 되어야 한다.


이는 끝없는 책임이 동반되는 것이다.


의복이 가진 무언가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동일선상에 위치시키며 옷 안에 내가 보이지 않고 내 밖에 옷이 보이지 않으며 오롯이 한 개체로 인식이 될 때 의복에서의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서로를 책임지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사하지 않는다.


옷장에 그 어떤 것도 버려지거나 잊혀질 수 없으며, 우리의 인생과 함께 걸어가는 그런 것이 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불가하지만 내 삶을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은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이것이 사랑과 모습이 다른 것인가 고민해본다.


이는 가히 사랑의 모습과 닮아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잉태가 아닐 뿐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만으로 새로운 생명의 잉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생물이라도 좋음과 즐거움의 가치를 서로 생각하며 공유할 수는 없지만 각 존재의 이유에 대한 좋음과 즐거움으로 공유가 가능하다.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나의 생명의 모습을 신사들에게서 찾는다.


그들의 의복은 순수하며 도덕적이고 쾌락에서 멀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신사들은 노력을 해왔다.


나 또한 삶의 모습과 의복의 모습이 합일화되어 하나의 개체로 보이며 그렇길 원한다.


그것이 오롯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08DEC2022


+ 썸네일 사진 : Dante and Beatrice, by Henry Holiday (1883). Dante looks longingly at Beatrice (in center) passing by with friend Lady Vanna (red) along the Arno River 출처 : Wikipedia - Beatice Porti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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