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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자의 옷장 Jan 11. 2023

죽음의 해석

죽음으로 해석하는 의복

*글에 들어가기 앞서 Pink Floyd의 Coming Back to Life와 High Hopes를 틀고 들으며 같이 읽어 보시는 것도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될 수 있어 추천드립니다.




우리는 죽는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그것을 막으려 할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다.


죽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지는 불치병과 같다.


아니, 잉태에 순간에 생기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은 우리에게 멀어 보이고 그에 따라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죽음은 너무나도 가까이에 즐비(櫛比)하다.




죽음의 운명은 우리에게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내 생각으로는 축복에 더 가깝다.


완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미완성의 미를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완벽한 것이 멋지다고 할 수 있겠지만, 완벽에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찾기 힘들다.


물론 결과주의사회에서는 결과가 모든 것이자 멋진 것을 이야기하지만 삶을 봤을 때 결과주의사회를 표방하진 않는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잃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같이 지낸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그 사람의 성격등을 이야기하며 추모한다.


그때에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고인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고인의 죽음을 결과적으로 해석한다.


고인의 이름 앞에 직업을 붙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사회’에는 ‘결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같이 살아간 사람들은 그를 결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와 시간을 같이 향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존의 시간이 들어오는 순간 죽음은 결과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개인을 비춘다.




육체와 영(靈)을 이분화해보자.


죽음은 육체의 끝에 있는 것이다.


어찌 본다면 육체의 결과이다.


육체에는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


그것은 육안으로 확연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진리이다.


그렇다면 영은 어떠한가.


육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육체는 태어남 -> 성장과 늙어감 ->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시간의 흐름 사이와 특정 나이의 육체에는 빈 공간이 없다.


그러나 영은 끝없는 성장을 한다.


영은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계속된 성장을 하며 나를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모든 순간에 영은 빈 공간을 보인다.


영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육체는 죽음으로 완벽해진다고 하지만, 영은 담는 그릇인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면 성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즉, 영은 한평생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단어를 사용하자면 미완성이다.


완벽하지 않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의 성장 가능성을 의미한다.


더불어 가치의 무한함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빈틈이 용인된다.


그것이 미완성의 미이다.


영은 미완성이기에 항상 아름답다.


우리는 미완성으로 죽기 때문에 죽음은 축복이다.




우리는 욕망에 산다.


우리의 욕망이 이룰 수 없어 하나의 이데아로 존재하거나, 욕망이 사회의 이치와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조리’를 경험한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부조리를 더욱 강하게 느낀다.


우리는 모두 욕망에 살기에 부조리를 느낀다.


이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선한 사람이 존재하다 하더라도 그는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선함을 행함에 있어 자신이나 사회에 부족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조리는 사회적인 문제들로 찾을 수도 있다.


태어나는 위치가 전부 다르므로 모두가 꿈꾸는 이데아와의 거리의 개인차가 존재하고 개인의 죽음의 모습이 전부 상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전쟁으로 죽고 누군가는 굶어 죽으며 누군가는 병으로 죽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평화안에 살고 누군가는 부자로 살며 누군가는 병 없이 노사 한다.


이것이 부조리가 없는 사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모순적이다.


모두가 부조리하기에 신은 없다 하지만 부조리하기에 신은 존재한다.


지금부터 종교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부조리는 원죄 때문이다.


원죄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세상에 떨어졌다.


부조리가 없는 사회는 이데아일 뿐이고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천국이다.


부조리는 고통을 수반하는데, 고통만이 즐비하다는 것은 부조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임을 의미하고 이는 지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어느 공간이며 부조리를 느낄 수도, 혹은 -목표의 달성이나 성취감 혹은 행복으로-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육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죽음으로 육체는 완벽해지지만 영은 그렇지 않다.


영은 이 세상에서 미완성인 것뿐이지 죽은 이후에 영이 도착하는 세상에서 -천국 혹은 지옥에서 어떤 형태로든- 끝없이 자유로우며 그 결과값으로 완벽하다.


이 세상은 그렇기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부조리에서 구하는 존재가 신이고 미완성에서 구하는 존재가 신이며 그렇기에 죽음은 축복이다.




우울에 빠져 죽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죽음은 세상의 도피처로 인식된다.


아는 자살이라는 것을 답이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로 이끈다.


이는 카뮈가 말하듯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과 같다.


고통과 부조리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고통과 부조리를 견디기 힘들면 죽음을 생각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사람은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분명한 진실이다. 너무나 자명하다 보니 오히려 쓸모없는 진실이다.”라고 말한다.


완벽은 부조리를 좇는 일이며 고통과 부조리는 우리에게 가치를 앗아간다.


삶의 이유를 없애고 우리를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가치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며 죽음을 축복으로 마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치가 있는 삶인가.


가치가 있는 삶은 어떠한 목표가 있는 삶이다.


이는 삶에 있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부조리를 마주하여 살아감에 대한 목표를 잃으면 인간은 포기와 허무를 느낀다.


또한 완벽함이나 이데아를 추구하는 데에서 오는 실패와 부수어짐도 인간에게 포기와 허무를 선사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도대체 우울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은 또 돌림노래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완벽함의 부재에 대한 것이 우울이다.


내 삶이 우울하다 느낄 때에는 사랑의 실패, 가정의 실패, 경제적 실패, 시험에서의 낙마, 처한 환경에 대한 반발감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수없이 많다.


사랑의 실패는 개인이 원하는 상대방이 떠난 이데아의 붕괴, 가정의 실패는 개인이 소중히 하던 가정이란 모습의 이데아의 붕괴, 경제적 실패는 개인이 원하던 경제적 이상에 대한 이데아의 붕괴, 시험에서의 낙마는 개인이 원하던 미래에 대한 이데아의 붕괴, 처한 환경에 대한 반발감과 분노는 개인이 원하는 환경에 대한 이데아의 붕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개인이 원치 않는 병에 걸려 원하는 목표와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이데아의 붕괴.


이렇듯 수많은 우울은 이데아의 붕괴에서 오며 우리에게 절망을 선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데아란 자신이 그리기에 완벽한 곳이다.


아니 완벽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해당 순간 그리는 것으로는 완벽한 곳이다.


그것이 개인에게 오면 상당히 감사한 것이지만, 세상은 부조리하기에 80억 개의 이데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이데아는 더욱더 존재할 수 없다.




우울의 확장으로 이루어지는 절망이 만들어내는 자살의 충동은 더 이상의 이데아가 그려지지 않을 때 자살로의 논리회로를 건드린다.


절망을 들여다보고 위에 말한 이데아의 붕괴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키에르케고르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을 보지 않는 이상, 개인은 개인 자신을 정확하게 마주하기 힘들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운을 “절망은 정신의 병, 자기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 즉 절망하여 자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형태”라고 뗀다.


그리고 이를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이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며 또는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인간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며, 간단히 말해서 종합이다. 종합은 그 둘의 관계이며, 이렇게 보건데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라는 말로 잇는다.


절망을 해석하는 일은 이렇듯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세 가지 형태는 -내가 해석하기에- 결국에 같은 자기이다.


절망이라는 것에 얽혀 있다면 자기는 그냥 같지만 다른 자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하듯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이유는 “영원히 죽어가야 하는, 또 죽어가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음을 죽여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모순, 이러한 자기 질병이라는 의미에서이다.”라는 것과 같이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종교를 가지고 왔지만 나는 종교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사실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과 비슷한-을 설명하겠다.



그것은 자신이 제3자가 되어 자신을 잔인하게 해체하여 해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개개인은 자신에게 관대하다.


그 이유는 고통과 절망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피함의 결과로 우리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결론은 자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절망하여 자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형태 전부 자기 자신임을 나타내며 절망을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있는 것이다.


절망을 해석하는 일은 지옥불을 걷는 것과 같다.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며 일일이 해석하여 그것을 내 몸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될 수 있다.


훈련이 된다는 말은 고통이 익숙해진다는 의미가 아닌 자살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만큼 자신을 객관화하며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일은 끝없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 사이에 붕괴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자신을 무한히 난도질하여 죽여야 한다.




 “어쩔 수 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2가지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모두가 1가지의 방향밖에 보지 못한다.


그것은 포기에 초연(超然)이다.


포기에 초연은 절망을 맞이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옳지 않다.


어쩔 수 없는 것이면 왜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어쩔 수 있게 할 것인지 해석한 뒤에 허공으로의 한 발자국이 아닌 땅으로의 한 발자국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의 발자국을 내디뎌야 한다.


그것은 자신만의 미완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절망은 공허 또한 불러온다.


공허는 허무주의를 일으키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개인은 항상 미완성의 존재로 존재함을 인지한다면 허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미완성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존재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다.


포기에 초연도 아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엔 겸손의 이야기이다.


완벽은 겸손을 눈멀게 한다.


완벽은 거만하고 오만하며 교만하다.


그리고 정신 위에 군림한다.


또한 개인을 잃게 만들며 육체와 세상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부수어졌을 때 다시금 재기(再起)하기 어렵다.


우리는 끝없이 부수어지는 존재기에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미완성이며 죽음을 입는 것이다.




물론 말은 쉽다.


나는 모든 사람의 부조리, 고통, 절망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깊음도 이해할 수 없다.


부조리, 고통, 절망이란 다분히도 상대적이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고통에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실패를 알고 수많은 이데아의 붕괴를 안다.


나는 나를 수없이 죽였으며, 심지어 나는 이미 죽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수많은 이데아의 붕괴 속에 심연을 누볐으며 그 끝없는 고민에서 카뮈의 부조리를 만나고 키에르케고르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의 구원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죽음을 걸쳤고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종교를 갖으며 위와 같은 결론들을 스스로 내렸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두려움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지닌 나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며 완벽에 굴복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욕망, 부조리, 고통, 절망에 자신을 포기하는 오만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앞을 보고 욕망과 절망과 부조리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며 나아가 우리의 죽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 해야 할 궁극적인 죽음이다.


죽음을 입는 것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가치이며 길이다.




죽음은 의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나는 ‘미완성의 미’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이를 표현하는 이미 세상에 있는 유일한 단어인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를 설명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모든 글들과 레퍼런스는 믿기 힘들지만 브루스 보이어가 말한 것들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레퍼런스 또한 확실하기에 <트루스타일>에 적힌 스프레차투라에 관한 내용을 많이 차용하겠다.-


사실 스프레차투라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탈리아 단어이다.


‘약간 헤롱헤롱한’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무심함’이라고 해석하며, 이탈리아 남자들의 완벽하지 않은, 일부러 어색하게 아이템들을 배치하며 멋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는 이탈리아 남자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영국의 이야기도 봐야 한다.


어디서 읽었는지 불분명하지만-기억속에 강하게 남아 언급할 수밖에 없는 강렬했던 말이나 출처가 없음에 죄송함을 표한다.- 분명히 내 뇌리에 박혀있는 글이다.


“완벽하게, 빈틈없이 입는 것은 미국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영국인들은 절대 그렇게 입으면 안 된다네. 빈틈이 필요하지.”


영국 할아버지가 말한 것이라고 나는 읽었다.


스프레차투라나 영국의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한 말은 미완성의 미를 의미한다.


나는 이 뜻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고민의 답은 죽음에 가까운 것으로 내렸다.


스프레차투라는 어디서 나온 단어인가.


브루스 보이어에 따르면 그 시작을 르네상스 시대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레의 <궁정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레의 <궁정론>을 보면 스프레차투라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적혀있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품격이 어떻게 습득되는가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관찰한 결과 인간의 행동과 말에 잘 들어맞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해 냈습니다. 즉, 훌륭한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허식을 위험한 장애물로 생각하여 멀리하고, 모든 면에서 예술적인 기교를 숨기고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하고 행동한 것을 꼭 성취하고야 마는데 그 과정이 아주 쉽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품격이란 바로 이러한 자세에서 솟아난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스프레차투라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들의 나열이다.


그럼 더 나아가 이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내 의견에 앞서 브루스 보이어가 차용한 말들을 보자.


의상의 달콤한 무질서는

옷의 욕망을 불 지른다.

어깨너머 내던져진 스카프는

절묘하게 흐트러져 있고,

부정한 레이스는 사방에서

진홍빛 가슴 옷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맷동은 태만하고, 그 때문에

리본은 어지럽게 흐른다.

거센 속치마의 매력적인

물결이 눈길을 끌고,

아무렇게나 맨 구두끈에서

나는 거친 세련미를 본다.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완벽한 예술보다

이것이 나를 훨씬 더 사로잡는다

-        로버트 해릭, <무질서 속의 기쁨>


기교를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예술이다.

-        라틴어 격언


넥타이에, 물론, 가장 신경을 많이 씁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우아함의 척도이니까요.

덕분에, 매일 아침마다, 몇 시간씩 허둥거립니다.

급하게 맨 것처럼 보여야 하거든요.

-        보 브러멜


진정한 편안함은 기예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연이 아니다.

가장 편안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춤을 배웠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알렉산더 포프


이 말들은 미완성의 미를 보여줄 수 있는 말들이다.


위의 말들을 보면 ‘부족함’이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스프레차투라는 자신의 부족함을 공공연하게 사회에 내비치는 행위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내비치는 행위란 겸손이라는 의미가 있다.


물론 이 겸손이 교만이 될 수도 있다.


알렉산더 포프가 말하듯 기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에 고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예는 꼭 필요하다.


기예란 그 사람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복을 입을 때 지식과 경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지식과 경험은 절대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지식은 수없이 많고 그것은 끝이 없다.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으며 지식이란 과거와 현재의 것이기에 미래에는 어떤 지식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듯 지식이란 과거부터 미래까지 인류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편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의 자신이 위치하는 곳에서 최대한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의복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지식을 머릿속에 주입하며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궁극적으로 겸손을 추구하고 완벽할 이유를 버려야 한다.


스프레차투라를 보여주는 좋아하는 말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하디 에이미스 경이 한 말을 추가하고 싶다.


“무릇 남자란 옷을 똑똑하게 구입하고 섬세하게 갖춰 입었지만, 마치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이 똑똑하고 섬세한 것은 수많은 지식과 경험이 받쳐줘야 하며 잊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스프레차투라를 실현하는 모습이다.




스프레차투라는 형식상 부조리를 입는 행위라고 해석한다.


완벽은 주창(主唱)하듯 존재할 수 없으며, 부조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의복에서 완벽을 추구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추가하게 된다.


아이템들이 완벽한 위치에 틈 없이 위치한다거나, 아이템들이 완벽한 상태로 위치한다거나, 완벽히 위치해 있는 어떤 것에 얹음으로 추가를 하여 더욱 완벽해지려 할 수 있다.


이것이 틀리다고 한다면 개인의 차이이기 때문에 단언을 할 수 없겠지만, 죽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틀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맥시멀리즘이 죽음에서 멀면 미니멀리즘이 죽음에 가까운가?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스프레차투라인가?’


전혀 아니다.


일단 맥시멀리즘과 미니멀리즘 일종의 디자인적 트렌드일 뿐이다.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비움의 미학인 미니멀리즘은 죽음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전혀 닮지 못하고 스프레차투라라고도 할 수 없다.


미니멀리즘 또한 완벽이다.


의복 자신의 위치에서 완벽하게 위치해야 하며 미니멀리즘에 반(反)하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프레차투라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부조리를 추구하며 의복을 입을 뿐이다.


스프레차투라는 이런 디자인된 어떤 것이 아닌 의복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제대로 발현되는 것이라 판단한다.


남성의 클래식 의복이 그것이다.


남성 클래식 의복은 ‘-부자인-신사(Gentleman)’-사실은 표방하는 것이 더 많은-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는 사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것은 뒤의 주제인 삶의 해석에서 다루겠다-


남성 클래식 의복이란 인간을 규율로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의복이다.


이는 카스틸리오레가 말한 ‘보편적 규칙’과도 일맥상통한다.


브루스 보이어가 정의하는 말을 살펴보자


“스프레차투라는 무분별한 즉흥성이나 일상적인 경솔함, 혹은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뜻하지 않는다. 요컨대 무모함과는 상관이 없다. 실상은 정반대다. 스프레차투라는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의식적인 노력, 꾸밈없는 꾸밈, 세심하게 계획된 무심함이며 나아가 가식적인 무관심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메시지를 담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력하고 있음을 감추는 능력이기에 노력이기에 노력이 드러나는 꾸밈과는 정반대이다.”


나는 이 말에 죽음을 얹고 싶다.


스프레차투라는 결국엔 삶에 대한 열정이다.


죽음 앞에 무릎 꿇지 않고-자살이나 체념으로- 자신의 열정과 부족함을 무심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죽음의 개념과 그로 나아가야 하는 모습과 같다.


부조리, 고통, 절망을 계획된 무심함으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이겨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재의 최고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영국의 늙은 노신사들이 기가 막힌 수트를 입고 구두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말을 쫙 펴서 신지 않고 약간 꼬깃하게 신는 것처럼 말이다.


스프레차투라는 완벽 그 이상의 미완성의 가치이자 겸손함으로 무장하여 나약한 자신을 표현하며 죽음을 입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입는다.


인간이 처음으로 의복을 입었던 기록은 -의복의 기원을 유일하게 설명해 주는(창 3:7)-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나뭇잎으로 자신의 중요부위를 가리는 것이다.


이는 식물의 죽음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그다음은 가죽으로 몸을 감싼다.


이는 동물의 죽음이다.


우리는 이렇듯 자연의 죽음으로 의복을 만든다.


죽음이 생명을 살리며 생명은 다시 죽음을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굴레이다.-이는 뒷 주제인 삶의 해석에서 더욱 깊게 이야기하겠다.-


그 앞에 서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복을 입는 행위는 끝없이 겸손해야 한다.


우리 개인의 힘으로 입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나약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것에 무릎 꿇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갈,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행동과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이며 그것이 죽음을 입는 방식이다.



감사합니다.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11JAN2023


+ 썸네일 사진 : Lamentation of Christ (1480). Andrea Mantegna 출처 : Wikipedia - Lamentation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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