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스트럭>
※ 유의사항: 본 리뷰는 영화 <원더스트럭>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아카데미는 물론 전 세계 씨네필들을 사로잡았던 영화 <캐롤>(Carol, 2015)을 기억하는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연인의 사랑을 영화에 담아내었던 감독 토드 헤인즈는 지난 2018년 5월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로 국내 관객들을 다시 찾았다. 혹자는 <캐롤>을 상상하고 <원더스트럭>을 보러 갔다가 실망하였을 수도 있다. 물론 기존의 토드 헤인즈를 좋아하던 관객들도 실망했을 수 있다. 결과를 살펴보면, 영화는 국내에서 큰 흥행을 하지 못했다. <원더스트럭>에 대한 관객들의 평은 지루하고 진부한 이야기라는 평도 존재했다. 줄거리를 한 번 살펴보면, 서로 다른 시대에 사는 두 아이가 알고 보니 서로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장장 2시간에 가까이 그것도 절반은 무성으로 진행되니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기 충분하다. 게다가 두 아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떡밥을 던져두고도 회수하다 마는 듯한 결말은 더더욱 관객이 <원더스트럭>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더스트럭>은 흥미로운 지점이 존재한다.
<원더스트럭>이 흥미로운 이유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각각 유성 컬러 영화와 무성 흑백 영화로 전개하는 것이다. 만약 두 시점을 모두 유성 컬려 영화로 설정했다면 <원더스트럭>에 대한 흥미는 반감한다. 영화는 크게 두 줄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1977년을 살아가는 소년 '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1927년을 살아가는 소녀 '로즈'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듯이 1927년이 첫 번째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The Jazz Singer, 1927)가 등장한 해라는 점에서 두 이야기의 서로 다른 형식적 특징은 감독의 의도가 명백히 존재함을 반증한다.
서로 다른 두 형식을 지닌 이야기는 교차 편집의 구성으로 전개된다. 이 교차 편집의 과정에서 영화는 쇼트 간 조형적 유사성(혹은 동일성)을 만들어낸다. '벤'이 문장 속에서 '별(star)'이라는 단어를 본 뒤 '로즈'가 자신의 어머니인 릴리언 메이휴의 모습이 담긴 '대중스타(star)'에 대한 기사로 넘어가는 장면이 있다. 또한, '로즈'가 물가에 종이'배'를 띄우는 장면 뒤에 '벤'이 물가의 나무'배'를 바라보는 장면이 이어지기도 한다. 하나 더 예시를 들자면, '벤'의 시점에 몰아치는 '폭풍'과 '로즈'가 극장에서 보는 영화 속에서 '폭풍'이 오는 장면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두 인물의 이야기는 같은 물건, 같은 사건, 같은 공간을 매개로 이어지면서 쇼트 간 조형적 일치를 이룬다. 이러한 편집의 구성은 마치 두 천을 봉합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영화는 두 천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를 바늘로 한 지점마다 꿰뚫어 이어나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이어지는 두 천은 서로 떨어지기 힘든 사이가 되듯이 영화 속 두 이야기 역시 결말에서 서로 떨어지기 힘든 이야기가 된다. 즉, 결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무성 흑백 영화와 유성 컬러 영화의 차이는 명백히 보이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특히 영화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서사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원더스트럭>은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이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을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원더스트럭'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원더스트럭'은 누군가의 소장품들을 보관하고 전시한 공간이며, 보관의 주체는 큐레이터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만이 큐레이터가 아니며, 누구나 자기 방의 큐레이터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큐레이팅을 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세상의 수많은 책, 가구, 물건들 중 자신의 방에 둘 것을 선정하고 비치한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도 큐레이팅은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이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저장해 두고 찾는 법을 지웠을 수도 있다. 뇌가 어떻게 작동을 하든 간에 인간은 기억을 큐레이팅 한다. 또 큐레이팅 한 기억을 다시 큐레이팅 해 일부만 남들에게 들려주고, 글로 작성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큐레이팅을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큐레이팅은 재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영역의 큐레이팅은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영역은 모호하고 불확정한 것이기에 언어, 물체, 동작 등을 매개로 재현되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거의 기억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말, 문자, 행동 등의 매개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재현을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는 앞서 말했듯이 다양하다. 과거에는 행동, 문자, 언어 등 그 방식이 한정적이었던 반면에 현재는 영상, 애니메이션, 그림, 모형 등 그 방식이 다양해졌다. 영화 속에서 재현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벤'의 기억은 관객에게 영화 그대로 재현되고, '제이미'의 생각은 말(소리)로, 다시 문자로 재현된다. 또한, 야생의 동물들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박제로 재현되고, 할머니가 된 '로즈'의 기억은 파노라마와 모형으로 재현된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현을 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한 결론으로 돌아가 보자. 먼저 '원더스트럭'은 한 인간 혹은 집단이 특정한 공간에 재현하고 싶은 것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해 보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음향기기만을 보관한 박물관이라도 그 이면에 재현하고 싶은 생각, 관념,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럼 영화 <원더스트럭>은 무엇일까?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이다. 토드 헤인즈가 재현하고 싶은 것들을 여러 방식으로 재현해 보여준 것이다. 영화 <원더스트럭>을 통해 토드 헤인즈는 서사, 무성 흑백 영화와 유성 컬러 영화의 차이, 사운드, 음악, 모형, 파노라마 등등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가득 담아 관객에게 보여준다.
다시 결론을 얘기하면, 영화 <원더스트럭>은 그 자체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이다. 따라서 관객은 <원더스트럭>을 보는 동안 토드 헤인즈가 큐레이팅 한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에는 유성 컬러영화도 있고 무성 흑백영화도 있다. 파노라마도 있고 동물 박제도 있고 영상도 있다. 말도 있고 문자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화가 이야기하는 바를 찾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등장한 문구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모두 시궁창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본다." 이 문장은 토드 헤인즈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 중 하나이지만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결말에서 '벤', '로즈', '제이미'는 모두 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별'은 꿈, 도전, 희망으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별'이 의미하는 바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 과정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 그 자체가 자신의 '원더스트럭'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개인의 '원더스트럭'의 내부는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