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이는 아이인가 부모인가
온 나라의 교사들이 아픕니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실은 그들이 병든 지는 한참 되었는데, 잘 사는 지역의 학교에서 누가 봐도 업무 탓에 스러져 간 꽃같은 교사가 불씨를 당기고 연이어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사연이 보도되자 외신 1면에 우리나라 교사 집회 소식이 게재될 만큼 들썩입니다. 시달리고 시달린 끝에 교사들이 수없이 자진해도 ‘개인의 우울증’ 운운하던 학교와 경찰이 근래 들어서는 그런 망발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10여 년간 반복된 사태인걸 언론에선 그간 뭐하다가 새삼스럽게 지금 관심 가져주는 척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그간 교사들이 당하는 괴롭힘의 정도가 심했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의 수가 늘어난 건 어찌됐건 고무적입니다. 약 5년 전쯤 신랑의 지인인 모 신문사의 기자가 저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기사 쓸 만한 소재를 혹시 아냐고 묻기에, 저는 최근 들어 교사들에게 쏟아지는 민원들이 말도 안 되게 많아서 이러다 아무도 교사를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지요. 그는 딱 이렇게 반응하더군요. “이런 건 기사거리가 안 돼요. 교사들끼리 불륜해서 학교에 대자보가 붙거나 학교 돈을 횡령한 교사는 없어요? 그 정도는 되어야 기사가 나죠.” 그가 떠난 이후, 신랑더러 저런 사람은 친구로도 생각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굳이 만날 경우가 생기면 밖에서 보고 우리 집엔 절대 들이지 말라고 쏘아붙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저는 분노에 휩싸이지만, 한편으로 몹시 의아합니다. 또 다시 스스로를 돌이켜 바라봅니다. 화를 내다가 그게 사그라들면 저 자신을 의심하는 건 저의 습관입니다. 부모님께선 제가 어릴 적부터 제게 걸핏하면 ‘너는 남들과 다르다’, ‘네가 그러니까 왕따다’라고 하셨으니까요. 전 한때 이런 발언들을 가스라이팅이라고 여겼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그저 부모님은 진실을 말씀하셨을 따름이었나 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버티기엔 너무도 이상적인 저의 사고방식을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주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정말 저와는 판이합니다. 왜 이리도 자신을 해치거나 공격할 잠재 대상처럼 타인을 바라보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용해먹고 버릴 대상처럼 타인을 바라보거나, 하인처럼 맘대로 부리고 인격을 짓뭉개도 되는 대상처럼 타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진정으로 겁나는 사실은, 이들이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학력도 직장도 번듯하다는 겁니다. 상위권 대학을 나와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직장을 다니는 이들도 이럴진대, 하물며 기본적인 교육조차 비틀려 받은 이들은 어떠한 마음가짐과 철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현 시점에선 사회적 분위기가 마치 ‘교사를 욕하면 내가 진상’인 듯하니 다들 말을 조심하는 추세인데, 이런 추세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교사이면 왜 욕을 먹을 수 없나요? 욕할 만한 행동을 했으면 욕을 먹어야지요. 교사 중에도 진상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우리가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배운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하고 폐를 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폐 끼치는 사람이 학생이면 그에 걸맞는 처벌을, 학부모이면 또 그에 걸맞는 대가를, 교사이면 또 그에 걸맞는 징계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현실에선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직폭력배 같은 범죄 집단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상식적이고 착실한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학생도 양아치보다는 정상적인 학생이 더 많고, 학부모도 진상보다는 합리적인 학부모들이 더 많고, 교사도 쓰레기보다는 그래도 열심히 뭔가를 해보려는 교사들이 더 많습니다. 확률적으로 정말 그럴 겁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소수의 이상한 이들을 단속하는 체계가 작동을 하였는데, 요즘에는 그런 체계가 작동하기는커녕 그들이 활개치게 만든다는 점이 다르겠지요.
아들을 키우면서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를 차례로 보내고 느낀 건 ‘아이가 어릴수록 학부모의 요구가 많다’는 거였습니다. 저도 학부모이지만, 다른 학부모들이 기관에 하는 행위들을 보면 그렇게 불만인데 당신이 집에서 직접 키워, 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회의를 들어가며 휴대전화를 문득 보니 어린이집에서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런 일은 흔치 않아, 어린이집에 통화를 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잠시 조용한 구석으로 갔습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과 전화 연결이 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어머니,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문장은 듣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집니다만, 아무튼 네, 무슨 일이실까요, 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들어보니 발달이 느리고 장애가 있는 친구를 선생님께서 챙기시는 동안 제 아들이 식전에 손을 씻겠다고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답니다. 그런데 수도꼭지가 냉수 쪽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온수 쪽으로 돌려져 있어서, 아들이 손을 데었다는 겁니다. 제게 즉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그 사이에 다른 선생님 한 분이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타왔다고 하셨습니다. 아 네, 에고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이따가 하원시킬 때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회의장으로 다시 가서 회의를 하는 내내 심장이 쿵쿵 뛰고 아들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저는 날듯이 달려가 어린이집에 도착했는데, 벨이 울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서 현관에 무릎을 꿇고 계셨던 겁니다. 아니 선생님 뭐하시는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제가 관리를 잘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라며 용서를 비셨습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선생님, 걔가 원래 성질이 급하잖아요, 선생님께서 무슨 잘못이 있으세요. 여러 명 챙기다보면 그럴 수 있죠. 괜찮아요. 제가 이런 종류의 말들을 하며 선생님을 일으키는 동안 사건의 발단인 제 아들이 해죽해죽 웃으면서 뛰어나왔습니다. 아들의 손을 보니 그래봤자 수돗물 온수에 덴 거라 물집도 없었고 약간 벌건 정도였습니다. 다행이란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옆에 섰던 원장님이 너무 미안하시다며 연신 사과를 하셨습니다. 아휴 별로 다치지도 않았네요, 괜찮습니다. 얘가 부주의한 건데요. 원래 이렇게까지 하세요? 이러실 필요 없어요. 저의 반응에 한시름 놓으셨는지 원장 선생님이 멋쩍게 웃으시면서 “아유 우리는 뭐 그냥 무릎꿇고 싹싹 빌면 돼요.” 라고 하시는데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제 인생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무릎을 꿇은 최초의 사건이, 고작 이런 까닭 때문이었다니요.
뭔가 세상이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할 무렵,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 놓았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일이 펼쳐졌습니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유치원 전용 풀장에서 물총놀이를 한다고 하여 아들은 잔뜩 기대 중이었습니다. 온몸에 선크림을 발라주고 래시가드를 입혀 만반의 준비를 다 해서 유치원에 보냈더니, 아들을 맞이하시던 원장 선생님께서 오늘 물총놀이는 취소라고 하셨습니다. 까닭을 묻는 제게 원장 선생님께선 “이따 소나기 예보가 있어서요.” 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도 예보를 보고 온 참이었는데, 말 그대로 소나기고 강수량도 아주 적었거든요. “소나기 오면 더 재미있는 거 아니에요?” 라는 저의 물음에 원장 선생님은 깔깔 웃으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대한민국 2%예요. 다들 아이 감기 걸릴까봐 걱정하세요.” 라고 응답하시더군요. 저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자동차에 고개를 갸웃하며 올라타자, 아버지께서 물총놀이 한다고 신나하더냐, 고 손자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소나기 예보 있어서 물총놀이가 취소래요, 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저와 똑같이 “소나기 오면 더 재미있는 거 아니냐?” 하셨고, 저는 아버지더러 “아버지도 대한민국 2%시네...”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어릴 적 비 맞으면서 놀아도 아무 문제 없던 저와 요즘 애들은 다른가보죠.
그러다 초등학교에 보냈더니 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정신없고 산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실시간 화상수업을 한다는 것만 해도 저는 선생님들의 노력이 대단하시다고 여겼는데, 화상수업 보니까 잠옷 입고 듣는 친구 있더라 그거 지적해라, 발표 기회 한 명 한 명 다 줘라, 미술수업 과정을 못 알아듣지 않느냐 한 명씩 봐줘라, 대면수업이 아니지 않느냐 수업료 환불해달라, 학부모들의 요구사항이 빗발치는 모양이었습니다. 거기다 담임 선생님께서 코로나 걸리시기라도 하면 학생들까지 전부 PCR 검사를 받아야 하니 역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개인 위생관리를 못해 너무너무 죄송하다고 장문의 문자를 보내신 담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전세계적 감염병인데도 옮았다고 또 죄인이 되셨네. 실은 그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옮은 거였는데도 죄인이었습니다. 이미 직장에서 제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여러 번 죄인이 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담임 선생님이 딱하시다고 여길 수밖에요.
그나마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입시라도 걸려 있고, 학생들이 사춘기라 부모의 말을 어차피 잘 듣지 않으니 학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기대를 상대적으로 약간은 내려놓는 듯합니다. 헌데 초등학생은 아직 학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기대를 높게 가져 그런가 ‘내 자녀도 잘못할 수 있다’는 추측을 하기가 그리도 힘든가봅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이 귀하지만, 그게 남의 자녀를 괴롭게 하면서까지 내 새끼가 대접받아야 된다는 식이라면 그건 아주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어린 학생들을 성적 순으로 줄세우지 말고 인격체로 대하라는 뜻에서 정기고사도 중학교 입시도 폐지했더니, 학습 정도를 계량하는 척도가 없는 탓인지 학생과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교사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더 심합니다. 당최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자녀 출석번호는 왜 바꿔 주어야 하고, 학급도 담임도 왜 바꿔 주어야 하고, 왜 하고많은 학생 가운데 자기 자녀한테만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왕의 DNA’를 타고나서인가요? 그걸 진짜 믿으시나요?
제가 어렸을 적에는 성인에 의한 아동폭력이 아직 만연했고, 그 폭력에 의해 계도가 되었다는 경우도 있었으며, 반대로 폭력이 대물림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여학교에 다녀서 목격하는 폭력의 강도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남학교에 다니던 제 동생은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오히려 겁이 난다’고 말할 만큼 교사에게 맞고 다녔습니다. 더구나 동생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리 학급 회장 및 학생회장을 역임하는, 소위 상위권 학생이었는데도 폭력의 손길은 동생에게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동생은 자기 뿐 아니라 다들 맞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퍼렇게 멍이 든 동생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저는 정말 착잡했습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성인에 의한 아동폭력을 없앤 데에 관해 저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때리던 예전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도보다, ‘때리지 않는 요즘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도가 더 현격하게 떨어져 보인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왜 요즘 학부모들은, 요즘 교사가 예전에 자신을 때리던 그 교사가 아닌데도 요즘 교사를 상대로 그렇게 모질게 구는 걸까요? 현대 사회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다양하게 해놓아 점점 제재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폭력은 폭력입니다. 정신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덜 보이니까 더 나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퇴근하자마자 전담 과외교사처럼 아들에게 딱 붙어서 전과목을 다 가르치고 준비물을 챙겨주는 저의 일과를 들여다보면, 전업주부셨던 제 어머니보다 직장 여성인 제가 훨씬 더 자녀에게 매여 살고 있는 듯해 저는 늘 불만입니다. 헌데 다른 세심한 학부모들과 저를 비교해보면, 제가 지나치게 방임하고 혹은 무심하고 거칠게 아들을 키우는 엄마처럼 되어버립니다. 저는 아들 손이 좀 데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소나기가 와도 야외에서 물총놀이를 시키자고 하고, 담임 선생님이 확진되셔서 아들까지 PCR 검사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서요. 심지어 문제집을 풀리다가도 9시 반이 되면 하던 걸 멈추고 바로 아들을 재워버리고, 아들이 어떤 친구에 대해 비난을 할 때 너도 그럴 때가 있잖니, 하고, 아들 선생님을 뵈면 얼마나 힘드세요, 라고 말하는 ‘아들 편 안 들어주는 엄마’입니다. 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 주변 부모님들은 거의 저같으셨습니다. 제때 재우는 게 중요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는 자녀의 행동을 자제시키고, 무슨 일이 터지면 교사의 입장이셨지요. 어른들은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의 못된 장난이나 청소년의 비행행위를 지적하셨으며, 해당 아이들이나 청소년의 부모들은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의 부모가 두려워 아무도 아이들을 말리지 않으며, 담배 피우는 청소년에게 한 마디 했다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성인도 존재합니다. 물론 장단점이 너무나 명확하므로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까지 하고 싶진 않습니다. 허나 어린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계도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최근의 현상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그들의 부모가 그릇된 교육관으로 이런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이전 글에서 저는 실제 가구소득이 어떻든 생활수준이 어떻든 남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물질적인 풍족함보다 마음과 정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사기 범죄가 줄어들 거라는 제 신념을 피력했습니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그릇된 교육관으로 자녀를 키우고, 자녀의 못된 장난이나 비행행위를 감싸며, 자녀를 돌봐주는 교사를 헐뜯고 괴롭히는 데 혈안이 된 부모가 있다면 결국 그 자녀는 범법자나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말 겁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를 때리고 아프게 했는데 우악스럽고 집요한 부모가 이러한 행위를 당연한 걸로 인식시켜 놓으면, 그 아이는 죄의식 없이 저를 속여 거액을 뜯고 저의 가정을 부수려 한 범죄자와 다름없이 자라게 되는 겁니다. 또한 이러한 부모와 자녀가 점차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는 안에서부터 썩어버려 머잖아 뿌리째 쓰러지게 될 테지요.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요.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입니다. 그 미래가 과도한 성인들의 욕심으로 망가지고 있습니다. 자녀의 깜냥과 관계없는 자신의 욕심을 자녀에게 투영하는 부모들은 늘 존재했습니다. 허나 과거엔 그 투영의 대가가 손상된 자녀의 삶이었다면, 현재 우리는 그 투영의 대가가 엉뚱하게도 손상된 교사의 삶이 되는 걸 목도하고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행동은 누가 뭐래도 잘못된 겁니다. 내 자녀가 고통을 당하는 꼴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막아내면서, 반대로 자녀의 선생님에게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고통을 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보듬고 아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가 할 수 없는 건 ‘인간다운’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공감과 위로, 배려라는 따뜻함이 모쪼록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기를 오늘도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