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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Oct 20. 2023

행복을 찾아서

지금, 바로 여기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 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 이상, ‘오감도시제1호’ 중에서


 193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군인과 경찰들에게 언제 어느 때든 끌려갈 수 있다는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는 폭격이나 총칼의 희생양이 될 거라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요. 군부 독재 치하에선 누명을 쓰고 쥐도새도 모르게 안기부에 잡혀갈까봐 공포에 떨었습니다. 현대의 대한민국은 식민 지배 시절도 군부 독재 시절도 아닌 엄연한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 있으므로, 국민들이 과거와 같은 이유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됐든 평화로워 보이는 이 시점에, 정신의학과 의원이나 심리상담센터 방문 예약자가 해마다 늘어 초진 혹은 첫 방문을 하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 건 자못 의아한 일입니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맹목적인 경쟁 속에서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들은 언제까지 그러한 좌절의 질주를 계속해야 하는 건가요.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들을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근현대 우리나라의 역사가 고통의 질곡을 지나온 만큼, 그 당시를 겪은 피해자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헌데 그들이 그들의 전철을 후손들이 밟게 하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노력하여 지금과 같은 사회를 만들어 냈는데도, 우리나라는 이제 GDP 기준 191개국 가운데 10위에 해당하는 경제규모를 갖추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나라인데도, 국민들의 행복 지수는 이상하리만치 낮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 행복 지수는 최하위권으로, 우리보다 지수가 낮은 OECD 국가는 그리스, 콜롬비아, 튀르키예 단 3개국 뿐이라고 하며, 안타깝게도 자살률 부문은 OECD 1위를 차지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연령별로 자살률 증감을 따져 보았을 때 10~20대가 압도적으로 자살률 증가 추세라는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에서 후손들을 살게 해주려고 피땀 흘려 희생한 선조들이 이 결과를 보면 통탄할 지경으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2012년 4월 2일, UN에서 최초의 ‘세계 행복 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가 상정되었고 매년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로 정하여, 이 날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세계 행복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행복 지수는 GDP,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사회적 자유, 관용, 부정부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총 7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산출된다고 하지요. 특히 연속으로 행복 지수 1위를 차지한 핀란드의 경우, 탄탄한 사회 안전망과 촘촘한 복지 체계가 그들의 행복을 유지시키는 비결로 꼽힙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 사회나 공동체 간에 서로를 도우려는 구성원의 의지가 낮고, 상호 간 의심으로 가득하며,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참 이상한 일 아닌가요? 저는 분명 학창 시절에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양은 전통적으로 ‘전체주의’를 표방하였다고 배운 듯한데, 재미나게도 개인주의여야 할 핀란드 사람들이 오히려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전체주의여야 할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각자 흩어져서 생활하고 있다니요.


 올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은 2015년 장강명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한국이 싫어서>였습니다. 외신은 어쩌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영화제의 개막작이 <한국이 싫어서>가 되었는지를 거듭 물어보았으며, 이에 대해 집행위원장이 ‘(영화 제목이) 특정 국가를 지칭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젊은 세대가 가진 어려운 점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하지요.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설은 여주인공 계나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설정이었던 반면 영화는 뉴질랜드로 떠나는 설정으로 바뀐 모양인데, 소설을 읽어본 저로서는 오스트레일리아든 뉴질랜드든 계나에겐 상관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계나는 그저 한국이 싫어서 떠났을 뿐이므로 세계 여러 나라 중 왜 굳이 오스트레일리아여야 했나에 대한 고찰은 별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고찰할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계나는 영어 공부도 충분히 하지 않고 무작정 우리나라를 떠났습니다. 그만큼 계나는 우리나라 특유의 치열함과 무한 경쟁, 꿈을 꿀 겨를도 없이 몰아가는 다그침 등이 속속들이 싫었던 탓입니다.


 실은 계나는 저를 다소 불편하게 만드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니만큼 작가가 계나의 행보에 대해 가치 판단을 따로 하진 않았으니, 제가 소설 감상의 일환으로서 이렇게 대놓고 여주인공 별로라고 할 수도 있는 거겠지요. 한국의 부조리와 그에 침잠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계나는, 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에 대해서는 어쩐지 관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국에선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 사회와 개인의 부정적 온상에 관해 맹렬하게 힐난했었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자 갑자기 ‘내가 문제지’라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외국이니까 이럴 수 있어, 란 관용의 산물인지, 아니면 선진국에서 사건이 벌어진 건 내가 부족한 탓이야, 란 열등감의 산물인지요. 소설 속에서 계나는 ‘사람 대접 받으려고 이민을 가는거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과연 계나가 거기서도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인종차별이 심하여 사회 문제로도 불거진 나라입니다. 또 계나는 시민권자가 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면서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하는데, 저는 계나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도통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계나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을 찾기란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앞서 언급했듯 무언가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이 자꾸 변하는 탓입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모호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들며 식재료와 술값이 싼 곳이 좋고,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살고 싶은 건 계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자존심과 존엄성을 팔아가며 살고 싶진 않아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이러한 바람과 막연한 느낌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원하는 행복한 삶의 형태를 발견했다면, 그걸 위해 필요한 사항은 무언지, 그리고 단념해야 할 건 없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자세한 조사와 연구가 동반되어야 그걸 구현해낼 수 있겠지요. 헌데 계나는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에 가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근거로 내세운 것들이 하나같이 ‘한국같진 않다’는 명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불행했으니, 한국같지 않으면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보장한다는 것인가요?


 기필코 이루어야 하는 꿈, 삶을 함께 가꿀 수 있는 동반자, 혹은 직업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행복의 요소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사람은 이 수많은 행복의 요소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갖추어야 행복해지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행복하려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명확한 요소가 그 나라에 있었어야 했습니다만 계나에게 그곳은 도피처이자 자기합리화의 공간입니다. 햇볕이나 술값, 식재료를 운운할 게 아니라 차라리 미세먼지가 없는 하늘이 좋아서 떠났다, 라고 했다면 제가 깊이 공감했을 지도 모르겠는데요. 계나는 또 한국에 남은 친구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오스트레일리아의 것과 비교하며 비웃는데, 타인이 그의 잣대로 자신을 재는 건 혐오하면서 정작 자신은 타인을 자기 잣대로 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니 계나는 연애 대상은 굉장히 쉽게 선정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을 자신의 동반자로 올려놓는 일에 대해서는 까다로웠겠지요. 글쎄요, 제게 있어 삶을 함께 가꿀 수 있는 동반자는 저 개인의 꿈과 직업적 성공 그 이상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행복에 있어 중요합니다. 제 신랑은,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만큼 행복의 필수 요소입니다. 아울러 저 또한 제 신랑에게 있어 그런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계나는 이토록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미워하는데, 그렇다면 고국을 떠나 우리나라로 귀화한 외국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요? 후진국에서 온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닌데요. 심지어 선진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고 잘 살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계나가 미워해 마지않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이 곳에 정착하고 우리의 말과 글, 역사를 배웁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일전 관람을 할 때 일본을 욕해가면서까지 우리나라 응원을 합니다. 왜일까요. 저는 소설을 읽으며 도대체 계나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많이 없는 건가, 어떻게 이렇게 밑도끝도 없이 우리나라보다 외국이 더 나을 거라는 확신을 갖지, 하고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사실 해외에 나가보면 우리나라만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우선 여기는 치안이 좋아 저처럼 작고 만만해보이는 여성이나 제 아들같은 꼬마도 아무런 고민 없이 밤에 산책을 나갈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고 시설이 깨끗하며, 의료는 말할 것도 없이 최고 수준인데다 저렴하고, 24시간 쉼없이 영업을 하는 가게들이 많은데다 물류가 발달되어 있어 언제 어디서든 생필품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연결망이 어디든 잘 깔려 있고 금융 시스템도 최신입니다. 어찌나 최신인지 45분만에 비대면 대출이 억대로 나와 제가 어마어마한 보이스피싱 손실을 겪긴 했지만요.


 애초에 국적을 바꿀 마음도 없었고 앞으로도 딱히 그런 계획이 없는 저로서는 제 삶의 동반자를 선택한 것과 같은 논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문제점을 고쳐 우리나라를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SDSN의 행복 보고서 이야기로 돌아가서, 행복 지수를 산출하는 척도가 되는 7가지 지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면적이 그리스나 북한, 쿠바 등과 비슷한데 GDP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높은 편이니 제가 봤을 때 이만하면 됐습니다. 사회적 지원이나 기대 수명도, 인프라와 의료가 좋으므로 나쁜 축에 속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적 자유, 관용, 부정부패,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 이 네 가지가 문제인데, 그나마 사회적 자유는 미미하게나마 나아지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막말로 언론이 연일 대통령 비난을 해도, 제가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나가서 대정부 1인 시위를 한다고 해도, 유신 정권 시절마냥 실종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부정부패는, 많이도 해먹은 높으신 분들이 차고넘쳐 솔직히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이고, 관용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아. 북한과 통일하는 것만큼이나 이 두 가지 척도를 올리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세대, 지역, 성별 간 갈등의 골이 깊어 틈만 나면 서로 싸우기 바쁘니까요. ‘실패를 단죄하는 사회’라는 오명도 아직 떨쳐내지 못하고 있고요.


 그래도 한동안 6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던 우리나라의 행복 지수 순위가 어쨌든 2023년에는 57위로 조금 올라섰습니다. 차후로도 작게나마 몇 계단씩 상승해서, 50위권 안에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가진 약점을 보완하려면, 언젠가 이야기했듯 고인 물을 전부 빼고 물 아래 가라앉은 진흙을 퍼내어 다시 깨끗한 물을 채우는 수준의 공력이 들기에, 이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다만 워낙 잠재력이 있었거나 잘해왔던 부분을 더욱 성장시키는 건 한층 빠르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이상이 오감도를 쓸 무렵 우리나라는 나라를 통째로 타국에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6·25의 참상을 목도한 맥아더 장군은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데 100년이 걸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저의 어머니는 우리나라엔 대통령이 영원히 같은 사람일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나라 역시 우리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어떤 어려운 때라도 앞으로는 잘 될 거라는 열망을 불태운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말하면 열정이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집요하지요.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을 자주 겪었는데도, 그만큼 뼈를 깎는 고생을 했는데도 국민들은 밝은 미래에 대한 염원을 꺾지 않았습니다.


 피싱 피해를 입고 나서, 총책은 잡지도 못했고 잡는다 하더라도 돈을 돌려받긴커녕 은행의 빚 독촉은 제가 받아야 한다는 억울함과 분노에 더는 못 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살아남아 꾸역꾸역 대출금을 갚고 있습니다. 다니는 직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박봉에 여기저기 모멸감을 주는 사람들 천지인지라 점심 시간에도 마주치기가 싫어 도망을 다니는 판입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처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제 아들조차 공부하는 로봇처럼 학교생활을 하고, 꿈같은 거 없고, 기계적으로 출근하는 한국인이 될까봐 염려가 됩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들이 우리나라를 저와 같이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요.


 우리는 집념의 민족입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을 일으켰어도 정치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역적으로 몰려 죽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몇 대에 걸쳐 모은 재산을 쏟아부었어도 끝내 독립을 못 보고 죽었지만, 본인이 옳다고 여긴 신념에 따라 살았던 선조의 후손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부디 현대의 젊은이들도, 팍팍한 현실이지만 등지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는 대한민국의 혼을 지켜나가길 바랍니다. 행복을 어디 먼 데서 찾을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하나 둘씩 만들어나가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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