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국의 패권 싸움이 일어났던 15~16세기 경, 스페인에서는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으로,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투는 소설들이 유행했습니다. 이는 스페인어로 악당을 의미하는 ‘picaro’란 단어가 변모한 ‘피카레스크(picaresque)’란 장르로 발전합니다. 피카레스크는 악인인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아무도 그의 악행에 토를 달지 않고, 도덕적 옹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초점과 시선을 따라가는 독자들은 그가 명백한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자연스레 주인공의 변명에 공감하거나 주인공에게 동정 및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현대의 우리나라에서는 피카레스크가 ‘한국형 다크 히어로물’로 변모하여, 선량한 인물이 해낼 수 없는 날카로운 세태 풍자를 가능케 하고 전세계적 인기를 구가합니다.
수십년 간 대중 또는 소비자는 정의구현을 외치는 전통적인 영웅상에 환호해 왔습니다. 특히 미국은 ‘영웅의 나라’로 불릴 만큼 각종 영웅들을 카툰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영화로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들은 선의를 대변하는 존재이니만큼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관객들의 눈살이 찌푸러들지 않을 정도로만 장면의 수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체 관람가인 히어로물도 있는걸요. 그러나 최근 인기를 끈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처음부터 악인이거나 목표를 위해 악인이 되며, 예상 가능한 행동을 보였던 과거의 착한 주인공과 달리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국의 다크 히어로는 오로지 생존이나 복수가 이들의 목표이며 주로 입체적인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즉 선한 의지로 움직이기보다는 자신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대한 반격을 목적으로 삼는다거나, 약자가 경찰이나 가족 등 주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장애물을 헤쳐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이러한 장르에 많은 세계인들이 공감한다는 건 결국 현재 약자에 대한 사회의 안전망이 그만큼 헐겁다는 걸 반증합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의 도덕성을 강화해왔지만, 배려의 손길을 받기는커녕 사각지대에 놓여 불합리한 처우를 받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컨텐츠는 종종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하며, 학교나 가정 등 친숙한 공간을 주 무대로 삼습니다. 이런 무대에서 다크 히어로를 각성하게끔 하는 악인들은 대부분 공권력과 결탁하였거나 재화를 많이 가진 소위 ‘금수저’입니다. 힘 없던 일반인이든지, 특별한 능력을 소유했더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주인공들은 금수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혹은 소중한 것을 잃은 후 직접 가해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나섭니다. 이와 같이 자극적이고도 묘하게 현실과 맞닿은 설정은 그만큼의 여운도 남겨, 마냥 선량하기만 했던 과거의 영웅들보다 더욱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관객 스스로를 그에 쉽게 이입하도록 합니다. 더구나 한국의 다크 히어로는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승리를 거두므로, 관객들에게 ‘사이다’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여 그들을 열광케 하지요.
엊그제 12년 간 학교폭력에 시달렸다는 영상 크리에이터 한 명이 우울증을 호소하다가 끝내 세상을 등졌습니다. 다크 히어로물에서는 주인공이 사회 규범에 구속받지 않고 악을 처단하지만, 부조리하고 각박한 사회일수록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자에게 모든 것이 유리하게 돌아가므로 가해자가 금수저인 경우 단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단죄는 고사하고 대다수의 피해자는 금수저인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하기가 힘들며, 가해자는 집안이 망하지 않는 이상 평생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부유하다는 점만 가지고도 만인이 찬양하고 환호하는 유명인이 될 지도 모릅니다. 참 불공평하지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격화되면서 부유함 혹은 궁핍함이 대물림되는 양상이 나타났는데, 이에 따라 금수저의 반의어로 흙수저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원래 금수저라는 단어조차, 없던 단어가 새로 생겨난 건데 말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채굴이나 제련이 금보다 더 용이한 은이 훨씬 널리 쓰였습니다. 화폐로도, 왕실과 귀족의 식기로도 쓰였기에 은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습니다. 따라서 금수저란 단어는 실은 2010년대에나 와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지, 본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용구가 이 ‘수저계급론’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현대에는 은보다 금이 더 귀금속으로 취급받기에 은수저 대신 금수저란 단어를 점차 많은 이들이 사용했고, 등급제 게임의 명칭에 따라 다이아몬드, 백금 등을 금보다 더 상위에 올려 ‘다이아몬드수저’라는 단어도 등장했습니다. 반대로 은보다 하위에는 동, 나무, 플라스틱, 흙 등을 배치시켜 부에 따른 계급을 표시하였습니다. 헌데 특기할 만한 점은, 서양에서 금수저를 ‘부자인 것 외에 이룬 게 없는 사람’, ‘부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등으로 다소 냉소적으로 사용하는 감이 없잖아 있는 반면,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금수저라는 단어를 해당 대상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시를 담아 사용하는 듯하다는 겁니다.
국제자산정보회사인 웰스-X와 듀크대 연구진이 자산 3천만 달러(약 330억 원) 이상인 전세계 초고액자산가 18,425명의 교육 정도와 상속 여부, 종교, 정치 성향 등을 분석한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자산가들 부의 원천을 ‘상속’, ‘상속 자산 증식(상속+자수성가)’, ‘자수성가’로 구분했는데, 자수성가형 자산가의 세계 평균 비율이 63.8%인 반면 우리나라 비율은 33.3%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자산가들의 ‘명문대 졸업 여부’를 들여다보면, 세계 평균 비율은 30% 정도였던 데 비해 우리나라 비율은 78.4%였다고 합니다. 전후 대한민국 경제의 특징은 역동성이었으며 신분 수직상승이 가능하였는데, 외환 위기 등을 거치면서 역동성은 사라지고 현재 대한민국 자산가의 무려 70% 가까이가 상속형에 고학력입니다. 이러니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여 남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금수저들이 서민들로서는 부럽고 질투가 날 밖에요. 일반인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는 재능을 쏟아부어 힘겹게 대기업 사원이 되는데, 그리고 그 중 극소수의 더욱 뛰어난 인물들만이 임원이 되는데, 재벌 3세로 태어난 젊은 누군가는 이런 노력과 재능 없이도 갑자기 임원이 됩니다. 본인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이에게는 허무감과 박탈감이 느껴질 법도 한 상황이지요.
금수저들이 권력과 재력을 과시하든 말든, 요새 들어 혜성처럼 나타난 인플루언서 등 신흥 유명인들이 여러 매체에 등장하든 말든, 태생적으로 남에게 별 관심이 없거나 이러한 분야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셀러브리티(celebrity)’, 줄여서 셀럽이라고 일컫는 유명인들의 영향력과 그들을 좇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무시하기 힘들만치 커지고 있습니다. 셀럽들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고, 그 관심을 마케팅에 활용하거나 트렌드를 조성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등 부가소득을 올립니다. 이들에게 있어 대중의 관심은 사업 수단입니다. 그리하여 관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은 물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려 언론과 SNS에 본인을 적극적으로 노출합니다. 이러면 우리는 해당 셀럽을 좋든싫든 지켜보게 되고, 흥미를 가지거나 비난을 하게 되며, 그럴수록 셀럽의 인지도나 부가소득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마침내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까지 되는 도널드 트럼프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경제적 역동성이 사라짐에 따라 부의 계급은 공고해지고, 나 자신이 아무리 애써 보았자 처음부터 특혜로 가득한 이들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요. 근래 우리나라의 10~20대의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증가 추세라는 사실이 문득 뇌리를 스칩니다. 그리고 그들이 팔로우하는 수많은 금수저와 셀럽들도 연달아 떠오릅니다. 초등학생일 무렵엔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는 듯하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신의학과와 심리상담센터를 들락거리며 등교 거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이 주변에 보입니다. 그들이 하필 중학교 2학년에 등교 거부를 하는 까닭은, 이른바 사춘기나 중2병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성적 산출이 중학교 2학년부터 시작되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초등학교에선 아예 정기고사가 없었고, 중학교 1학년은 자유학기제 시행으로 정기고사를 보지 않으니 요즘 학생들이 정식으로 성적 무한 경쟁에 뛰어드는 시기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겠거니’ 하던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예체능을 제외한 전과목의 학업성취 결과를 100점 만점에 몇 점으로 받아드는 순간 인정하지 않으려던 현실의 벽을 절감하게 됩니다. 금수저도 셀럽도 아니지만 웬만큼 잘 사는 줄 알았던 내가, 알고보니 기득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학업조차 다른 친구들보다 떨어집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조기 교육이나 선행학습으로 나보다 훨씬 더 앞서나가고 있는 마당인데, 나는 기본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학교 진도는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빠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학교에 가기가 싫어지겠지요.
초중고 12년을 무사히 마친 성인에게도 고민은 이어집니다. 4차 산업혁명이 경고했던,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도 그렇지만, 일과 쉼의 균형이 중요해지면서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일자리의 문턱이 몹시도 높아졌습니다. 비상한 두뇌나 착실한 태도를 갖추어 명문대에 진학했다 할지라도 마음에 드는 직장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이러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도, 전문대나 지방대를 나온 사람도, 명문대를 나온 사람도, 취업 탓에 골머리를 썩습니다. 입사 자체도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데 그리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보는 풍경은 또 내가 원하던 게 아닙니다. 주 52시간 근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도 이미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80시간이 넘어가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불합리한 사건사고가 터지고, 워킹맘은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퇴사하고, 퇴사한 빈 자리는 남은 직원들이 메꾸고, 사무실 안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관리자나 상사는 혀를 차며 “이래서 여자를 입사시키면 안 돼,”라고 조소를 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조소하는 관리자나 상사가 여성, 그것도 ‘딸을 가진 여성’인 경우도 심심찮게 봅니다. 정말 뭘 어쩌라는 건지요.
내가 되고자 하는 나와, 현실 속 내가 다른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이 두 가지 사이의 간극을 인지하고 있고, 가급적이면 간극을 좁혀보려 평생에 걸쳐 공을 들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는 지극히 드물게 행복한 사람일 겁니다. 헌데 간극을 좁히기는커녕, 현실 속 나의 모습을 이건 내가 아니라며 거부하고 결코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수준만을 좇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나를 찾아줘>란 2014년 개봉 영화가 있습니다. 세간의 시선에 집착하여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부부의 이야기가 아주 잘 그려져 있고, 특히 화면을 장악하는 여주인공의 연기는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란 관객평에 손색이 없을만큼 보는 이를 오싹하게 만듭니다.
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실업자가 되었고,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한 여인이 현실 속 자신인데도, 어릴 적부터 알파걸로 널리 알려진데다 하버드 대학 출신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주인공은 절대로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유명 작가인 부모님이 본인을 모델로 하여 쓴 동화책 제목대로 ‘놀라운 사람’이어야만 했으니까요. 영리한 그녀는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토대로 아무렇지 않게 배우자를 다시 손아귀에 틀어쥡니다. 이미 그녀의 실체를 알아버린 배우자는 진저리를 치지만,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영위해야 이전까지 누리던 삶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가정에 돌아옵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염증으로 가득한데도, 고락을 함께 한 응원하고픈 부부인 척을 하며 18년을 더 살아가기로 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우리의 병폐가 한국형 다크 히어로물 열풍을 탄생시켰습니다. 아울러 기형적인 부의 세습이 상속형 자산가와 그들의 자녀를 셀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정작 그 컨텐츠를 시청하거나 셀럽을 팔로우하는 대다수의 서민들은 온 힘을 기울여보았자 다크 히어로도, 금수저도, 셀럽도 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물론 잘 만든 컨텐츠는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에 직접적으로 물음표를 던져 경각심을 촉발하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점을 갖겠지만, 그런 과정에서 비추어지는 엄혹한 실재감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우울감과 자괴감을 줄 수 있습니다. 셀럽들의 풍요로운 일상생활, 다듬어진 외모, 세련된 스타일도 개인의 패션 감각이나 인테리어 소품 등을 보는 안목은 높여줄지언정 내가 아닌 나를 과도하게 희구하는 악영향을 낳을 테고요. 글쎄요. 가난한 것보다야 부유한 게 좋고, 무력한 것보다야 권력이 있는 게 좋겠지만, 지나친 허영심으로 나 자신을 부정하고 어거지로 내가 아닌 사람이 되려 애쓰는 건 그릇된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아닌 세간의 시선에 의해 나의 모습을 바꾸려 할수록, <나를 찾아줘>의 여주인공마냥 허황된 인간관계를 가지게 될 뿐입니다. 더욱이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이 ‘나는 왜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는가’라며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출신과 부모를 탓한다면 그 또한 단연코 지양해야 하는 행동이고요.
거듭되는 말이지만, 내가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이는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판단하는 이 역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체계가 아쉽고, 비윤리적인 이들이 소유한 부에 질투가 나고 억울하겠지만, 그러한 분함이나 동경을 나 스스로를 망치는 원인으로 삼지는 말아야겠지요. 직장에서 제게 함부로 구는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저는 저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조금씩 해치고 있는데, 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입니까. 남이 뭐라 하든,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나를 지켜야 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한 사람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나의 존엄성과 개성을 해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잘 들여다보고, 내가 원하는 꿈과 목표를 현실과 맞닿게 설정하고, 그걸 위해 한 발씩 나아가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가치 있는 삶을 얻어야만 우리는 금수저나 셀럽이 부럽지 않고, 굳이 다크 히어로처럼 악인을 처단하려 몸부림칠 필요도 없으며, 그제서야 행복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향하여 걸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