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전문가 책쓰기의 출발은 글이 아니라 기준이다

'전문가의 책쓰기' 브런치북, 세번째 글

by 멘토K


전문가 책쓰기의 출발이 글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사실을 나는 꽤 늦게 깨달았다.

처음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글부터 붙잡았다.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흐름은 자연스러운지, 설명이 부족하지는 않은지에 온 신경을 쏟았다.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많았으니 글로 풀어내기만 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이 나왔다. 출간은 되었고, 평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그 책들은 나의 경력을 밀어 올리지 못했다. 책은 있었지만, 나를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그때의 나는 기준 없이 쓰고 있었다.

무엇을 말할지보다 어떻게 말할지가 먼저였고, 어떤 독자를 남길지보다 얼마나 많은 독자를 끌어안을지가 더 중요했다. 기준이 없으니 문장은 부드러웠고, 내용은 풍부했지만, 책을 덮고 나면 저자의 얼굴은 흐릿해졌다. 책을 읽은 사람이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번의 출간을 거치고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기준이 없는 책은 친절해 보인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로 독자를 안심시킨다. 반박당하지 않도록 모든 경우의 수를 열어둔다. 문제는 그 순간 책이 전문가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도 아닌 글이 된다는 점이다. AI 시대 이전에도 이 문제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더 명확해졌다. 정보와 설명은 이미 넘쳐나 있고, 기준 없는 글은 가장 먼저 묻힌다.


나는 한동안 책이 잘 안 되는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다.

시장이 포화라서, 독서 인구가 줄어서, 마케팅이 부족해서. 하지만 여러 권의 책을 낸 뒤에야 방향을 바꿔 생각하게 됐다. 같은 시기에 출간된 책들 중 어떤 책은 조용히 사라졌고, 어떤 책은 저자를 중심으로 기회가 연결됐다. 차이를 만든 건 문체도, 분량도 아니었다. 기준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을 쓰기 전에 글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기준은 무엇인가?. 이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는 과감히 놓아도 괜찮은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원고는 시작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기준을 세운다는 건 선을 긋는 일이고, 선을 긋는다는 건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전문가의 책쓰기에 반드시 필요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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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생기자 글은 오히려 쉬워졌다.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을 다 담으려는 욕심이 줄었고, 하나의 판단을 중심으로 사례를 선택하게 됐다. 책은 얇아졌지만, 메시지는 또렷해졌다. 독자의 반응도 달라졌다.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묻는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정보 확인이 아니라, 판단의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실수는 반복된다.

기준을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원고를 쓰다 보면 다시 친절해지고 싶어질 때가 있다. 혹시 오해받지는 않을지, 너무 단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이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초고를 덮고 처음 세운 기준 문장을 다시 읽는다. 이 책은 누구를 위한 책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쓰지 않을 책인가를 확인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책은 다시 설명형 문서로 후퇴한다.


전문가의 책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외주 주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사고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일에 가깝다. 이 경계 안에서만 이야기하겠다는 선언이 책의 형태로 남는 것이다. AI가 문장을 대신 만들어 줄 수 있는 시대일수록 이 선언은 더 중요해진다. 기준 없는 책은 AI가 요약한 정보 속으로 흡수되지만, 기준 있는 책은 요약을 넘어 저자를 남긴다.


나는 책을 쓰며 수없이 기준을 수정해 왔다.

처음 세운 기준이 너무 넓어서 실패한 적도 있고, 지나치게 좁아서 독자와의 연결이 끊긴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 하나다. 완벽한 기준은 없지만, 기준 없이 쓴 책은 반드시 후회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책이 자산이 되지 못했다는 후회,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대부분 여기서 시작된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 책을 쓰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혹은 이미 한 권 이상을 써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경우든 글쓰기 전에 기준을 세우는 연습부터 해보길 권한다. 어떤 문장을 쓸지 고민하기 전에, 어떤 판단을 남길지부터 결정해보길 바란다. 그 순간 책쓰기는 부담스러운 작업에서 전략적인 선택으로 바뀐다.


전문가 책쓰기의 출발은 여전히 글이 아니다.

기준이다. 이 기준이 분명해질수록 책은 빨리 쓰이고, 오래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 나 대신 말하기 시작한다. 이 연재는 그 기준을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쓰는 법보다 남기는 법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 세 번째 글이 작은 방향표가 되기를 바란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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