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책쓰기, 네 번째 글]
이력서를 버려야 AI 시대 책이 살아난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오랜 시간 현장에서 성실하게 쌓아온 경력이 있는 전문가일수록 그렇다. 나 역시 그랬다. 첫 책을 쓸 때 나는 그동안 해온 일들을 빠짐없이 담고 싶었다. 학력, 경력, 수행 프로젝트, 강의 이력, 자문 경험까지. 빠진 게 있으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책은 나를 증명하는 도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믿음이 가장 큰 함정이었다.
나는 20여 권이 넘는 전문서를 쓰는 과정에서 이력서를 여러 번 책으로 착각했다.
책의 앞부분은 늘 비슷했다.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얼마나 오래 이 분야에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현장을 거쳤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때는 그게 독자에게 신뢰를 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책은 팔렸지만, 독자는 나를 기억하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건 정보였지, 저자의 얼굴이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AI 시대에 이 문제는 더 분명해진다.
이력서는 AI가 가장 잘 정리하는 영역이다. 몇 줄의 입력만으로도 경력 요약, 핵심 성과, 전문 분야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런 시대에 이력서형 책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요약 정보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책이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내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책의 역할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닮은 책의 공통점은 설명이 많다는 것이다.
왜 이 일을 해왔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읽다 보면 성실함은 느껴지지만, 질문은 생기지 않는다. 독자는 정보를 확인했을 뿐, 저자를 찾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경력이 길수록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쌓아온 시간이 아까워서,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서 책이 점점 이력서처럼 변한다.
나 역시 여러 번 이 과정을 반복했다.
어떤 책은 출간 직후 반응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졌다. 상담 문의는 늘지 않았고, 강연 요청도 일시적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다음 책에서는 더 잘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글의 완성도가 아니었다. 책 안에 여전히 이력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력을 나열하는 순간, 책은 과거형 문서가 된다. AI 시대에는 과거형 문서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
전환점은 책을 읽은 한 독자의 말에서 시작됐다.
그는 책이 유익하다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신 건가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책에 그 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자각했다. 나는 무엇을 해왔는지를 썼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왔는지는 쓰지 않았다. 이력서는 있었지만, 나만의 기준은 없었다.
이력서를 버린다는 건 경력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력을 자랑하지 않고도 드러낼 수 있을 때, 그 경력은 비로소 힘을 갖는다. 이력서는 증명이고, 기준은 선언이다. AI 시대의 책은 증명서가 아니라 선언문에 가깝다. 나는 이런 기준으로 일해왔고, 앞으로도 이 선을 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이 분명할수록 책은 오래 살아남는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다. 이력서를 덜어내면 불안해진다.
혹시 내 실력이 과소평가되지 않을지, 너무 단순하게 보이지 않을지 걱정이 올라온다. 나 역시 지금도 원고를 쓰다 보면 다시 이력서를 끌어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문장인가, 독자의 판단을 돕기 위한 문장인가. 전자라면 지운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책은 다시 안전한 이력서로 돌아간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전문가의 책은 경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경력을 통해 만들어진 기준을 보여준다. 독자는 그 기준을 보고 저자를 선택한다. 이력서를 버려야 책이 살아난다는 말은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여러 번의 실패와 시행착오 끝에 받아들였다.
만약 지금 책을 쓰려 하고 있다면, 원고를 시작하기 전에 이 질문부터 던져보길 권한다.
이 책에서 내가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선언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는 순간, 책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력서를 내려놓을 용기를 낸 순간부터, AI 시대에도 살아남는 책쓰기가 시작된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