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책쓰기, 여섯번째 글
AI는 쓰고, 전문가는 판단을 남긴다. 이 문장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쓴 책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문장이 내 판단이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장이 설명과 정리라는 이름으로 안전하게 포장된 문장이었을까.
출간작가로서 30여 권이 넘는 전문서를 쓰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자주 이 경계를 넘나들었다.
AI가 등장하기 전에도 문제는 비슷했다.
설명을 잘하면 전문가로 보일 거라 믿었고, 정리를 잘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쓸 때마다 최대한 친절해지려고 애썼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배경을 덧붙이고, 오해할까 봐 가능성을 열어두고, 반박당하지 않으려고 문장을 둥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책은 매끄러워졌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저자의 판단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이 문제는 더 분명해졌다.
지금은 설명과 정리를 AI가 더 잘한다. 더 빠르고, 더 균형 잡혀 있고, 더 친절하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가 책에서까지 설명에 머문다면, 독자는 굳이 그 책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AI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에서 경쟁하는 순간, 책은 소비재가 된다. 읽히고 끝난다. 경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AI를 경계했다.
책쓰기를 더 어렵게 만들 것 같았고, 전문가의 영역을 잠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현장에서 여러 실험을 거치며 생각이 바뀌었다.
문제는 AI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책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었는지였다. AI를 활용해 원고를 빠르게 만들었지만, 그 원고를 그대로 책으로 내보냈을 때 결과는 늘 비슷했다.
책은 그럴듯했지만, 저자의 색은 옅었다. 판단이 빠진 책은 누구의 책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AI를 쓰는 방식을 바꿨다.
AI에게는 정리와 초안을 맡기고, 그 위에 내 판단만 남기기로 했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설명을 지우고 판단을 남기는 순간, 문장은 날카로워지고 불편해졌다.
이 정도로 단정해도 괜찮을까, 너무 개인적인 건 아닐까, 누군가 반대하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 계속 올라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 질문을 없애기 위해 문장을 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그 불편함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전문가의 판단은 늘 책임을 동반한다.
이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순간, 반대 의견도 함께 불러온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가 판단을 숨긴다. 설명 뒤에 숨고, 사례 뒤에 숨고, 균형이라는 말 뒤에 숨는다.
나 역시 그렇게 책을 써왔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 대부분 오래 남지 못했다. AI 시대가 되자 그 한계는 더 빨리 드러났다.
책이 자산으로 남기 시작한 건, 판단을 전면에 두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내가 실제로 선택해온 기준을 적었다. 어떤 제안은 왜 거절했는지, 어떤 방식은 왜 쓰지 않기로 했는지, 어디까지는 고집하고 어디서 물러났는지를 솔직하게 남겼다.
그 문장들은 설명보다 훨씬 짧았지만, 반응은 훨씬 깊었다. 책을 읽고 연락을 주는 사람들의 질문이 달라졌다. 정보 확인이 아니라, 판단의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이 경계에서 계속 흔들린다.
원고를 쓰다 보면 다시 설명이 늘어나고, 판단은 뒤로 밀린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은 AI가 써도 되는 문장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책임져야 하는 문장인가.
전자라면 과감히 줄인다. 후자라면 문장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이 질문 하나가 책의 성격을 완전히 바꾼다.
AI는 쓰는 도구다.
하지만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특히 책에서는 더 그렇다. 책은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저자의 사고방식을 고정하는 장치다.
이 장치에 판단이 빠지면, 책은 기능을 잃는다. 아무리 잘 쓰여도, 아무리 많이 팔려도, 전문가의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 AI를 활용해 책을 써볼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AI의 도움으로 원고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원고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다. 설명을 남길 것인가, 판단을 남길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책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
AI 시대의 책쓰기는 더 쉬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어려워졌다.
글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판단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AI는 계속 발전할 것이다. 설명은 더 정교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의 책은 더 단순해져야 한다. 대신 더 분명해져야 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버렸는지, 그 판단을 남겨야 한다.
AI는 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책쓰기는 가벼워진다.
대신 전문가에게 남는 과제는 하나다. 어떤 판단을 남길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책은 비로소 AI 시대에도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책은 더 이상 단순한 출간물이 아니라, 당신의 기준을 대신 말해주는 자산이 된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