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부터 지금까지 나는 상큼이를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관찰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 관찰을 신의 사랑과 연결시키면서 '아, 신이라면 이런 사랑이려나?' 추측도 하게 되는 날들이 기뻤다.
그러나 나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산후우울증.
지금까지도 잘 지내왔고 어느 정도 감정조절도 가능했기에 남편과 싸우는 일도 별로 없었고 서로 말도 이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적된 100일의 피로와 스트레스는 우울함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이건, 피해 간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출산 후의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신호였다.
피해 간다고 생각했으나, 누적된 건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상큼이가 짜증 나는 날이 있었다.
상큼이가 자야 나도 자고 집안일도 할 텐데, 게다가 배까지 고픈 상태였다. 더 성장한 상큼이는 잘 생각이 없이 또랑또랑했다. 상큼이가 잠을 안 자면서 하루의 생활 패턴이 무너졌는데 해야 할 모든 일이 뒤로 미뤄졌다.
까짓 거 안 해도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게 잘 안 됐다. 뭔가 전업주부의 책임감 같은 거였다.
상큼이는 안 자고 울고 떼쓰고 눈은 이미 졸린데 잠투정이면서도 자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발 자. 제발 자.'
그날은 남편이 재택 하는 날이었다.
상큼이가 계속 칭얼대면서 우는데도 남편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했으나, 일하는 남편에게 나는 상큼이를 담당한다 생각하고 끝까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남편도 짜증 나고 졸려서 재우려고 하는데 안 자는 상큼이도 짜증 나고 배는 너무 고프고... 상큼이에게 왜 안 자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애는 죄가 없다'를 속으로 외치면서 상큼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서 고생이라는 생각과 함께 남편은 일하니까 내가 해야지라는 생각이 겹쳐 상큼이의 울음을 그저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칭얼댐이 좀 줄었는데 그때 남편이 나와서 '애가 잠을 안자네... 아이고...' 하며 상큼이 방에 들어왔다. 솔직히 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일하느라 힘들겠지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덮고 남편이 상큼이를 재우겠다고 해서 상큼이를 넘겨주고 난 부엌으로 나왔다.
배를 채우기 위해 간단하게 시리얼을 먹으려 했다. 시리얼은 덩어리로 된 시리얼이었는데 덩어리가 커서 숟가락으로 부셔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시리얼만 쪼개면 되는 건데 접시까지 같이 치면서 우유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데 그 행동을 멈추지 못했고 오히려 기분이 나아지는 걸 경험했다. 접시를 때린(?)만큼 사방에 우유와 시리얼이 튀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로 숟가락을 던져버렸다. 식탁엔 숟가락으로 인해 패인 상처가 났고 나는 그저 멍하게 사방으로 쏟아진 우유와 시리얼을 보았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놀랬고 상큼이를 안고 있는 채로 괜찮냐며 연달아 물어봤다.
지금 내 행동에 이성도 있었는데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이 나아졌다는 게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놀란 남편은 상큼이를 그냥 침대에 두고서 바닥에 널브러진 우유와 시리얼을 치웠고 나도 정신을 차리고 우유로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시리얼을 먹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했다.
이게 바로 산후우울증인가?
그때 바로 통제가 안 됐고 마치 나와 분리되어 행동하는 또 다른 '나'가 있는 기분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스트레스가 쌓인 줄 몰랐다'며 나를 다독였다.
사실 남편이 방에서 안 나온 게 더 스트레스였다는 걸 남편은 모른다.
남편은 나를 위해 집안일을 자기가 다 하겠다며 나섰고, 나는 고맙다고 말했으나 속으로는 상큼이를 돌보는 게 제일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남편은 나보다 상큼이의 울음에 약했고(스트레스받아함) 상큼이를 놀아주는 건 잘했다.
내가 엄마라서 견딘 걸까? 인내심이 더 있었던 걸까?
남편과 나는 다른 점들을 발견한다. 일단 아기에 대한 반응속도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그냥 그렇게 만드신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역할이 있겠거니 하고 더 상큼이를 잘 돌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내 안의 폭력성이 드러난 걸까,
무언가 부실 때의 희열을 알게 된 걸까, 난 괜찮은 건가?
남편이 급하게 호캉스를 가자고 했다.
아무래도 내 상태가 남편에겐 위급해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뭐 그런 걸로 그럴까 싶었지만, 내심 속이 답답했던 건 사실이기에 알겠다고 했다.
나 사실은 많이 지쳤던 걸까
우울했으나 감사함이 커서 몰랐던 건 아닐까
호르몬은 피할 수 없구나.
마침 친언니에게 연락이 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고, 언니는 지금의 내 때에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그 시간이 그저 잘 지나가길 바라야 한다고 했다.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상큼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나를 위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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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전날의 사건 때문인지 감정 통제가 잘 안 되는 기분이 들었다. 죄 없는 상큼이에게 괜히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낼까 봐 당장 유모차 끌고 밖으로 나갔다.
추워진 날씨로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내 볼을 스쳤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시린 볼을 그저 바람에 내버려 둔 채 차가움을 느끼며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을 상큼이와 바라봤다.
‘상큼아, 이게 가을이야. 곧 겨울이 될 거야’
그렇게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걸으면서 차근차근 뒤돌아 생각해 보니 가장 힘들었던 건, 화가 나는데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갓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함께 육아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에게 화를 내기엔 도무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고. 그러나 화는 나고.
이 생각이 나를 꾸준히 괴롭혔나 보다. 이게 바로 호르몬의 영향인 건가? 이유 모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서 내가 작아지고 아기가 미워 보이는 시기. 산후우울증. 나는 상큼이가 너무 잘 자라주고 있어서 고맙고 감사했는데 그렇다고 호르몬이 날 내버려 둔 건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애꿎은 곳에 화풀이하지 않도록 밖을 나가서 나를 환기시켰다.
상큼이에겐 엄마, 아빠가 전부일 텐데
엄마가 정신 바짝 차려볼게.
오늘도 너는 사랑스럽구나. 태어나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