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리 미용실 / 작정하고 여행자

: 타닥타닥 제주에서 2주 차

by 이막내작가

12일, 두모리 미용실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토독토독!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타닥타닥!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이치더니, 이내 우두두두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랐다. 하늘이 우르릉거렸다. 이불을 끌어안았다.

빗소리가 커질수록 아늑해졌다. 바깥세상에 큰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 집의 안과 밖, 그 경계를 두드리는 소리. 경계를 더 명확하게 구분 짓는 소리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한없이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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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큰 태풍이 왔다. 등교를 했다가, 수업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중에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했다. 책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태풍이 몰고 온 비와 바람에 온 세상이 거칠게 변해 있었다. 한 손으로 우산을 쓰고 또 한 손에는 아이에게 줄 우산을 챙겨 학생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과,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1층 문 앞은 난리통이었다. 난리통 속에 아빠 얼굴이 보였다. 아빠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막내야!"

아빠는 커다랗고 투명한 비닐을 꺼내 펼쳤다. 내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을 비닐로 감싼 뒤 그 끄트머리를 잘 잡으라며 내 손에 쥐어주었다. 비닐이 어찌나 크던지 내 온몸이 감싸였다. 앵? 이게 뭐야? 왜 우산이 아니야?라고 물을 겨를도 없이 아빠가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먼저, 가! 아빠는 언니 찾아갈게!

투둑 투둑! 비닐 위로 빗방울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바람에 비닐이 파닥파닥 거렸다. 앞서가던 아주머니와 아이의 우산이 동시에 뒤집혔다. 사정없이 불어닥치는 비바람에 우산이 속수무책이었다. 아빠가 씌워준 비닐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걸어갔다. 뭔가 재미있었다. 아빠는 내게 우산 대신, 비닐을 뒤집어 씌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우산처럼 뒤집어지지 않는 비닐이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이불속에 누워 있던 그 순간을...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하늘은 해가 진 것처럼 어두웠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칠게 들려왔고, 이불속은 너무나 아늑했던 기억.


오후가 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미용실에 갔다. 개운해진 하늘처럼 나도 개운해지고 싶었다.

제주에 온 이후, 하루에 2번씩 샤워를 하면서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이 무척 귀찮아졌다. 사실 제주에 오기 전, 미용실에서 거금을 주고 파마를 했다. 코로나 이후 제멋대로 자라온 머리카락을 다듬고 머리끝에 C컬을 살짝 넣는 세팅 파마를 했더랬다. 금세 쓸데없는 짓을 했다 후회했다. 컬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짐 같았다. 무엇보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말리는 일이 가장 귀찮았다.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머리를 잘라야겠다. 아니, 머리 말고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 어디서 자를까? 고민을 하다가, 동네 미용실을 발견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영어가 들어가지 않았고, 지역명을 딴 '미용실'이란 점이 좋았다. 소박한 가게 이름에 비해 건물 외관이 깔끔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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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용사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지금, 머리 자를 수 있어요?"

"네~ 그럼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예약 여부 따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설 수 있는 미용실이라니! 좋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계신 줄 알았더니 할머니 한 분이 화장실에서 나와 뒤쪽 소파에 앉으셨다. 알고 보니 파마를 다 마치시고, 딸을 기다리는 중이시란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묶어질 만큼만 남기고, 반듯하게 잘라주세요."

"여행 오셨어요?"

"네"

"여행 오셔서는 대부분 머리 안 자르시는데?"

"머리 말리기가 너무 귀찮아져서요."

"그렇죠? 머리카락이야 또 금방 자라는데, 머리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머리 자르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거울 너머로 말씀하셨다.

"나도 예전에 저렇게 어깨까지 머리 늘어뜨리고 다녔는데... 늙으니까 머릿수도 다 빠져버렸어."


요즘 늙음에 대해 종종, 자주 생각하던 차에.... 할머니의 늙음이 할머니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도, 저희들도 다 늙을 텐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감히 아직 제대로 늙어보지 못한 주제에 선을 넘는 것 같아 말을 꾹 참았다. 대신, 문득 생각난 친언니를 팔았다.

"할머니는 머릿수 많아 보이시는데요? 저희 언니는 40대 후반인데, 할머니보다 머릿수가 더 없어요."

(언니, 미안.)

할머니 표정에 변화가 없다. 내 이야기를 잘 못 들으신 건지, 별 감흥이 없으신 건지, 도통 기분을 알아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찰랑찰랑 가벼워졌다. 무더운 여름이니까. 여행 중이니까. 자유분방하게 산발한 헤어스타일이 맘에 든다.



번외/ 10일, 작정하고 제주 여행자


주말이다. 제주도민들처럼 주말을 보내자는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오늘은 작정하고 여행자 모드다. 가보련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을 모두 돌아보련다! 따라오라!

IMG_7911.JPG 사려니 숲 가는 길
IMG_8027.JPG 산굼부리

많이 덥지? 그늘을 찾아가자.

IMG_8091.JPG 비자림

점심을 먹었으니, 다시 힘을 내보자꾸나.

IMG_8285.jpg 섭지코지
IMG_8314.JPG 쇠소깍


번외/ 11일, 오늘은 쉬자


전날 15,000걸음을 넘게 걸었으니, 오늘은 쉬자.

그래도 아침 산책은 가야지? 아침 산책길에 바위 위에서 날개를 말리고 있는 '가마우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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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용한 마을 안, 햇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과,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과, 커피와, 고양이가 있는 카페에서 오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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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카페에 산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자기 나타난 녀석이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왔다. 초코라떼 냄새를 한 번 맡더니,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흠... 뭘 좀 아는 고양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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