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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Feb 21. 2023

너는 나의 동행자

: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른 살 차이 조카와 이모

 다섯 살 조카와 단둘이 집을 나섰다.

 언니, 그러니까 아이의 엄마가 동행하지 않은 채 오롯이 나 혼자 조카를 데리고 어딘가를 가는 건 처음이었다. 주일 아침, 조카는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졸래졸래 따라왔다.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이모는 예배를 드리고 조카는 예배를 구경했다. 다섯 살 아이가 설교 내용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제 딴에는 눈앞의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얌전히 앉아 있었다.

 예배가 절반 즈음 지났을 때였다. 조카가 에-취! 재채기를 했다. 순간, 노오란 콧물이 조카의 콧구멍에서 튀어나와 대롱대롱 매달릴 틈도 없이 그대로 코와 입 사이에 붙어버렸다. 조카가 나를 쳐다봤다. 당황한 표정,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 이모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의 표정, 짧순간 조카의 얼굴에서 그런 생각들이 읽혔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에는 휴지도, 손수건도 없었다. 사람들 틈에 앉아 있던 탓에 예배당 밖으로 조카를 데리고 나올 수도 없었다. 길게 생각할 새가 없었다. 내 두 손가락으로 조카 얼굴에 널브러져 있는 콧물을 걷어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종이 쇼핑백 안쪽 면에다 콧물을 닦아냈다. 조카의 얼굴도, 내 손가락도 얼마나 깨끗하게 닦였을까 마는... 그걸로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그다음 조카의 표정. 이모가 해결해 주었다는 안도의 표정. 나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정. 그 순간, 내 앞에 있는 다섯 살 아이가 온전히 나에게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모를 믿어서, 내 손을 붙잡고 바깥세상으로 선뜻 따라 나온 아이. 내가 아이의 손을 놓치면, 혼자서는 집에 찾아올 수도 없는 작고 연약한 존재. 어깨가 무거워졌다. 새삼스럽게 책임감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얼마 전, 열다섯 살이 된 조카와 단둘이 일본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조카를 데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 의지할 것은 기초 회화 수준의 영어 실력과 번역기 앱뿐이라 두려웠다. 조카는 더 이상 다섯 살이 아니었지만, 성인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조카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뿐이라는 생각에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다섯 살 조카의 손을 붙잡고 교회에 다녀오던 10년 전 그날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철저한 준비뿐이었다.

 두 달 전부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입국을 위해 코로나19 백신 접종 증명서를 준비하고, 부모를 동반하지 않는 미성년자의 해외여행에 필요한 서류를 확인한 후, 주요 일정을 정하고, 숙소와 항공편을 예약했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열차를 타고, 갈아타는 일, 숙소를 중심으로 일정에 포함된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마다 구글맵 로드뷰로 미리 확인하고, 조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 휴대폰에 영사콜센터 전화번호와 해외여행 관련 안전앱을 설치했다. 혼자서도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번역기 어플과 함께 일본어 자판도 미리 깔아 두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조카와 껌딱지처럼 붙어 있기였다. 호루라기를 하나 구입해 가서,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호루라기를 불까? 에이, 그건 너무 심했다.


 ❊ 번외(참고): 2023년 2월 기준, 미성년자(조카의 경우, 만 13세)가 부모 없이 일본에 입국하려 할 때 필요한 서류는 없다. 일부 블로그(관련업체의 홍보글)에서 일본의 경우에도 입국 시 혹은 호텔 체크인할 때 '미성년자의 해외여행에 대한 부모동의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미리 준비해 가라고(영문 동의서는 국가기관에서 발급해주지 않아 업체에 맡겨야 한다. 돈이 든다.) 광고를 하고 있지만, 영사관에 확인해 보고 직접 다녀와본 결과 입국심사, 호텔 숙박 시 요구하는 서류는 전혀 없었다. 한편, 항공사별로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 탑승에 대해 별도 규정이 있는데, 우리가 이용했던 아시아나 항공의 경우 미성년자 탑승에 제재가 없었다. 여행 국가, 이용하려는 항공사, 그리고 미성년자의 나이(만 나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외교부 영사관과 항공사 측에 정확히 확인하고, 숙박업체에도 예약 시 이메일로 필요한 서류가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일본으로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조카는 출국 전부터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일본 간사이 공항에 발을 내디딘 첫날, 입국 심사를 마치고 오사카로 향하는 열차를 탈 때까지 열다섯 살 조카는 10년 전 다섯 살 조카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내가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 이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존재. 오직 내가 아이의 보호자라는 생각.

 그것이 내 무례한 생각이었단 사실을 알아차린 건 바로 다음날부터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조카보다 더 성숙했다고 할 것도, 조카가 나보다 더 미숙하다고 할 것도 없는, 우리는 누가 누구의 보호자가 아닌 그저 함께 여행을 하는 동행자였다. 오히려 내가 아이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언어였다. 일본어라면 '스이마생(すいません)', '아리가또 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이외에 들을 수 있는 말이 없는 나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를 자주 보았던 조카가 짤막 짤막한 일본어를 알아들었다. 이모! 잠깐 여기서 기다리래. 이모! 봉투 구매할 거냐고 물어. 뜻밖의 통역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어? 덕분에 당황스러운 상황을 여러 번 모면했다. 조카가 할 수 있는 조금의 일본어와, 내가 할 수 있는 조금의 영어와, 훌륭한 번역기 앱(개인적으로 파파고 번역기를 좋아한다. 이미지 번역, 타이핑, 음성 번역 조작이 다른 번역기에 비해 더 쉽고 정확했다.)의 조합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 없이 묻고 말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오사카역이나 교토역은 통과하는 기차가 많아, 플랫폼을 찾아가는 길이 복잡했다. 15번 플랫폼이 어디지? 한와선(JR 서일본 철도노선) 타는 곳은 도대체 어디야? 그때마다 조카는 나보다 빠르게 이정표를 찾아내고, 열차 안 안내방송에서 들려오는 정류장 이름도 곧잘 알아들었다.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 할 때에는 군말 없이 자기 짐을 도맡았고, 우리가 뭔가 헤매고 있을 때마다 번역기를 켜서 행인에게 먼저 묻는 것도 내가 아닌 조카였다. 토토로 굿즈 샵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너무 좋아서), 서른 살 더 많은 이모가 쇼핑을 마칠 때까지 잔소리 없이 기다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엔 우리가 발견한 일본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다가, 일본과 한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가 참 감사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런 말들이 통한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행 5일 째는 배탈이 심하게 나서 꼼짝 못 하고 숙소에 누워 있는 내 등을 가만히 쓸어주는 아이. 내가 알던 다섯 살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을까. 

 여행 전 내가 했던 그 모든 걱정들이 불필요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혹여 일본에서 내 손을 놓치더라도 혼자서 얼마든지 집에 찾아올 수 있을 것처럼 야무지게 자란 조카를 마주하면서, 한없이 어리고 미숙하고 부족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왠지 아이를 믿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조카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지는 이미 몇 해 전부터였다. 더 이상 이모 손을 잡기 위해 팔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아도 되고, 이모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 않아도 될 만큼 키가 자랐고, 그만큼 생각과 마음도 자랐다는 걸... 나는 이제야 인정한다. 

 앞으로 너는 또 얼마나 자랄까. 네가 자라는 동안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점점 확장해 가는 너의 세상을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나도 자라야 할 텐데. 몸은 늙어가더라도, 마음과 생각은 조금 더 성숙해져야 할 텐데. 이모는 요즘 그런 고민들을 해.


  



 번외 짤을 소개한다.

 내 언니, 첫째 조카의 학교 일정 때문에 여행을 함께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 나의 언니는, 요즘 자주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우리에게 비행기 안에서 찍었다며 사진을 전송해 보낸다. 비행기 티켓 값이 많이 들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왼쪽) 시작은 이러했다.  (중앙, 오른쪽) 그 후, 언니는 종종 비행기를 탄다고 한다.

 - 언니~ 브런치에 언니 사진, 진짜 올려도 돼?

 - 응, 괜찮아. 어차피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를걸.

 - 그.. 그래. 부디 그러길 바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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