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同期)

<자의적 퇴직공무원> 12. 함께였던 사람들, 함께인 사람들

by 이막내작가

6호 사이즈의 우체국 택배 상자에 꾸역꾸역 넣어서 4년째 방치해두었던 짐을 정리했다. 기상학에 관련된 책들과 몇 년 간의 업무노트, 버리지 못하고 넣어두었던 이런저런 파일철들을 끄집어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지만, 다시 읽을 일 없을 책들이 결국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목숨을 부지했다. 손때와 함께 책장 한 장 한 장에 묻어 있는 10여 년의 시간들을 버리는 것 같아, 도저히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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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3명의 청년들이 기상청에 입사했다. 고향도, 출신 학교도, 나이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6주 간의 신규자 교육을 함께 받는 동안 우리는 '동기(同期)'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6주가 지나고 인사발령을 받은 우리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멀리는 백령도, 울릉도, 흑산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가게 된 근무지가 누군가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밟아본 땅이었고, 처음 밟아본 땅이 아닐지라도 모두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낯선 업무 속에 던져졌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뭉쳤다. 싸이월드에 클럽을 개설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마음을 나눴다. 어느 날의 고단함, 어느 날의 즐거움, 업무와 관련된 정보들도 나누며 서로의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밤을 꼬박 새우는 야간근무에도, 설날이나 추석에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을 때도, 새해가 되는 첫 순간에 12시 관측 전문을 넣으면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란 위로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2년 차부터 점점 클럽을 방문하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업무가 늘고, 새로운 곳으로 다시 인사발령이 나기도 했다. 결혼을 하는 동기들도 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뜸해지기 시작했다. 클럽은 오랫동안 비워놓은 집처럼 썰렁했다. 어느새 8급, 7급이 된 동기들은 전국에 흩어져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또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그나마 근무지가 같은 청에 소속되어 있는 동기들끼리는 종종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예보 현업을 하는 동기들은 교대근무조가 같으면, 근무 때나마 메신저를 주고받고 영상회의를 통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교육이나 워크숍에서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동기들도 있었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점점 멀어졌고, 나 역시도 간간히 연락을 이어오던 동기들과만 소식을 주고받았다.


2017년, 퇴직을 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어느 날 카카오톡 단톡 방에 초대가 되었다. 동기들이었다. 지난 7~8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던 동기들이 절반이 넘었다. 반갑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나, 이제 퇴직했는데...' 이제야 이런 단톡 방이 만들어진 것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몇 주 동안 누군가의 결혼 소식, 승진 소식, 업무에 관한 이야기들이 종종 오갔다. 나는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동기들의 소식을 읽었다. 어쩐지 이제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대화가 다시 뜸해졌고, 누군가 대화방을 나갔다. 그 틈을 타서 나도 단톡 방을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호적에서 도려내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더 이상 '동기'라는 이름으로 함께할 수 없는 내 존재가, 버려진 자식처럼 서글펐다. 1년이 지났을까? 한 녀석이 다시 단톡 방에 동기들을 모았다. 나를 잊지 않고 초대해주었다. 이번에는 단톡 방을 나가지 말아야지,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생각했다.


2006년, 43명의 동기가 문경새재에서 모였다. 6주 간의 교육이 끝나갈 무렵, 1박 2일간의 MT(Membership training)가 있었다. 극기훈련에 가까운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고되게 치른 첫날, 한밤중에 우리는 문경새재 3 관문을 향해 산을 올랐다. 어느 구간에 이르자, 우리를 안내하던 선배님들이 휴대하고 있던 모든 빛을 껐다. 달도 뜨지 않은 밤, 문경새재 산속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43명의 동기들이 한 줄로 섰다. 앞사람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채 어둠과 침묵 속을 걸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손에 잡히는 앞사람의 어깨와, 뒷사람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는 감각만 느껴졌다. 적막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겨 딛는 동기들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다음 날, 전날 밤의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서웠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동기들의 발걸음 소리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15년 전 그렇게 말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곁에서 묵묵히 함께 걷고 있는 동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인 것 같다.

퇴직을 한 후, 나는 (자칭) 기상청의 민간 대변인으로 살고 있다.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도, 누군가 예보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아직도 고기압이면 맑고 저기압이면 비가 오는 줄로만 아는 사람들에게, 고기압 가장자리에서도 비가 내리고, 심지어 고기압 한가운데서도 느닷없는 소나기가 내릴 수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포털사이트에 잘못 표기된 강수 시작시간 때문에 기상청이 욕을 먹고 있을 때는 내가 억울했다. 일기예보는 우리 할머니 무릎이 더 잘 맞춘다는 댓글에 "싫어요"를 누르고, 세금이 아까우니 월급을 다 반납하라는 댓글 앞에서 부르르 화가 난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노고를 옆에서 단 하루라도 지켜본다면 결코 말하지 못할, 기상에 대해 조금만 깊이 있게 공부해본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다. 내가 기상청을 대변하는 이유는, 기상청이란 조직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곳에는 내가 함께 하며 지켜보았던 성실한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더 정확한 예보를 내기 위해 결코 이길 수 없는 자연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에다. 매번 지는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욕을 얻어먹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 때문이다. 그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여전히 기상청을 사랑한다.


2020년 12월 31일 동기 중 한 녀석이 단톡 방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몽글몽글한 글을 시작으로 여럿 동기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인사를 올렸다. 올라오는 글들을 가만히 읽고 있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나도 짧은 인사를 올렸다. 며칠 후, 한 녀석이 내 카카오톡을 타고 이곳 브런치에 들어와 구석구석 흔적을 남겨놓고 갔다. 아무 말 없이 슬며시 다녀간 동기 녀석의 흔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음이 뭉클했다.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제 같은 길을 걷진 않지만, 나와 함께였던 사람들이 있다. 또 나는 그들과 함께이다. 지금은 마음뿐일지라도, 단톡 방에서는 유령처럼 숨죽이고 있을지라도, 혹여 언젠가 단톡 방을 다시 나오게 될지라도, 설령 각자 삶을 살아가기에 바빠 모두와 연락이 끊기더라도, 세월이 이보다 더 흐른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를 못 알아보게 될지라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전직 기상인'이란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을 테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단톡 방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 동기 녀석의 말처럼, 서로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각자의 길에서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삿말을 끝으로, 새해 첫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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