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퇴직공무원> 11.
류시화 작가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책을 보면, 퀘렌시아(Querencia)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페인어인 "퀘렌시아"는 투우장의 소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라고 한다. 소는 투우장에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정해놓고서, 투우사와 싸우다 지칠 때면 이 비밀스러운 장소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을 고르며 다시 힘을 모으고 기운을 받아 나온다고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게도 퀘렌시아가 생겼다.
글을 쓰는 동안의 나는 흔들리는 갈대다. 바람이 슬쩍 지나가기만 해도 쉽게 흔들린다. 매일매일 희망과 절망의 날 선 경계 위를 걷는 기분이다. 어떤 날은 내가 쓴 글에 스스로 흡족해한다. 글이 하나의 이야기로 잘 꿰어진 것 같을 때, 세상에 유일무이할 것 같은 표현을 적어낼 때. 내 손이 써놓고, 내 눈이 놀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써놓은 글들이 부끄럽고 한 글자도 새롭게 써지지 않는 날이 왔다. 문득, 글을 쓰는 의미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퀘렌시아를 찾는다.
내 퀘렌시아는 마음속 어딘가에 지어놓은 오두막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두 세 평 남짓의 작은 방이 나온다. 방 안에는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모두 내가 받은 마음들이다. 자세히 보면 전구마다 어떤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누군가 내게 응원과 격려와 위로의 마음을 건넬 때면, 나는 그 귀한 마음을 들고 이곳으로 달려온다.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지워지지 않는 네임펜으로 꾹꾹 눌러 적듯 전구에 이름들을 하나씩 새긴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 글을 쓸 힘이 나지 않을 때, 이유 없이 마음이 심란할 때에도 이곳을 찾는다. 방안에 들어와 불을 켠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마음들이 아롱아롱 빛을 내는 순간, 마음속의 두려움들이 사라진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볼 힘을 얻는다.
고마운 마음들은 카톡(카카오톡)을 통해 날아오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때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주는 이, 태풍이 올라올 때마다 내 생각을 해 준 이, 내가 좋아하던 패스트푸드점 '버거왕'을 지나갈 때마다 나를 기억해주는 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 석자를 검색해주는 이, 잊을만하면 내 소식을 궁금해하며 전화를 걸어주는 이도 있다. 가끔씩 얼굴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다. 글을 쓰겠다고 일을 그만뒀으니, 하루 8시간 일하던 시간만큼 글을 쓰라고 나를 채찍질해주는 이도 있다.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 글에서 좋은 점을 찾아주는 이도 있다. 가지각색의 마음들이지만, 하나같이 따뜻하고 밝다. 유쾌함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고마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마음도 있다. 올해 받았던 한 카톡은 나와 친분이 없던 이가 보내왔다. 직장에서 서로 안면은 있었지만, 같이 근무해본 적이 없었다. 인사발령으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그곳이 내 마지막 근무지였던 것이다. PC에 남겨두었던 내 흔적들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묻는다 했다. 그리고 익숙한 장면이 담긴 반가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조금 전에 찍었다는 따끈따끈한 사진 안에는 내 마지막 근무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응원하고 좋은 글 쓰시길 바래요." 그 마음을 받자마자, 나는 또 내 마음속 방으로 달려갔다. 고마운 마음을 매달아 두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퀘렌시아'이기도 하다.
과거, 글을 아무렇게나 끄적여도 좋을 때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랬다. 직장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친구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싸이월드 다이어리나 네이버 비공개 블로그로 달려갔다. 키보드 자판 위에서 열 손가락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가 닿았다.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현재, 이뤄야 할 목표가 생겨버린 지금은 가끔 그렇다. 많은 경우, 써놓은 글이 덜 익어 보인다. 풋내가 나는 것 같아 부끄럽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어떤 글을 쓰고 난 후, 어질러진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한 기분이 든다. 상처 난 곳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 밴드를 붙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런 글을 쓸 수 없는 날에는, 내가 선택한 길을 나보다 더 기대하고 응원해주는 고마운 마음들이 나를 버티게 해 준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 안부를 물어주고 그립다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힘이 될 줄은 몰랐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 위에서도, 그 빛나는 마음들이 나를 걷게 한다. 그 고마운 마음들이 내겐 퀘렌시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