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퇴직공무원> 10.
퇴직을 하고서 한량이 되었다.
한량(閑良)의 본 뜻은 고려 후기~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을 의미했으나, 보통 '일정한 직사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넓게 쓰였다고 한다.
본 뜻에 비추어보면 아직 '작가 등단을 하지 못한 작가 지망생'이고, 보통의 넓은 의미에 비추어보아도 '일정한 직업 없이 놀고먹는 사람'이니, 나는 한량이 맞다.
20~30대의 나는 일 복이 많았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끝나지 않고 간간이 이어졌다. 최저임금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가는 곳마다 일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일이 많은 곳만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일 복도 복인지는 모르겠으나, 20대 후반부터 시작한 공직생활에서도 복이 따라왔다. 처음 몇 년, 얼뜨기 같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많은 일을 했다. 주어진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업무가 쏟아졌다. 물론 가끔 한산한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통장에 들어온 월급이 머쓱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월급 따불! 을 외치고 싶었다. 하얗게 불태우던 30대 후반의 어느 날 퇴직을 결심하고서야, 생애 첫 한량 시즌이 왔다.
한량이 되고서 가장 좋은 건, 정해진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천근만근인 몸을 억지로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다. 호우나 대설, 태풍이 올 때면 낮밤을 가리지 않고 불려 나가던 비상근무도 더 이상 없다. 자유의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회사를 중심으로 내 삶이 돌아갔다. 교대근무를 할 때에는 현업 스케줄이 기준이었고, 상일 근무 때에는 주요 업무의 마감기한과 일정들이 다이어리를 먼저 채웠다. 반강제적으로 참석했던 교육이나 워크숍 때문에 개인의 대소사가 틀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동시에 회사는 1년 365년 기계처럼 동일한 성실함을 요구했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과 마음은 매일 같지 않았다. 종종 몸이 상하고 마음이 다치는 날들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당장 해내야 하는 업무 때문에 나를 추스르는 건 퇴근시간 이후로 미뤘다. 가장 잔인했던 건, 가족의 사망으로 인해 주어지는 경조사 휴가 일 수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 동안 무너진 마음을 대충 쓸어 모아 놓고 출근을 했다. 3837일을 보내는 동안, 때로는 온 힘을 다했고 때로는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내 컨디션에 맞춰 몸을 움직여도 좋을 자유가 생겼다. 내 마음이 내키는 만큼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10년 6개월 동안 볼모 잡혔던 내 시간들이 풀려났다.
지난 세월, 내가 지불한 시간들의 대가가 공짜는 아니었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덕분에 나는 꽤 오랜 시간 돈 걱정 없이 지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잤다. 사주고 싶은 것들을 사주고,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했지만, 덕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얻은 게 어디 돈뿐일까?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을 얻었다. 성취감 명예, 경험과 사람들도 얻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지불한 것에 비해 더 큰 대가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란, 그 많은 대가를 돌려주고 되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저 배를 두드리고 흥얼거리며 흘려보낼 수가 없다. 그래도 좋을 시간들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어쩌면 한량도 타고나는가 보다. 요즘 나는,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말에 절감한다. 한량 노릇마저도 쉽지가 않다. '시간'이라는 양날의 검이 내 손에 쥐어졌다. 하루 온종일 TV 채널을 돌리고 누워 있어도 마음 편했던 휴무날들은 사라졌다. 정해진 업무 시간이 없으니, 명확한 쉼도 없다. 눈치를 주는 상사는 없지만, 여러모로 눈치가 보인다. 조금만 더 뒹굴거리자는 '나'와, 오늘 하루를 공칠 거냐고 등짝을 때리는 '나'. 나와 내가 치열하게 다툰다. 몸은 한량인데, 마음은 한량이 되지 못했다.
이 글을 시작하고서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몇 주를 묵혔다. 그러는 동안, 우주힙쟁이(TV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의 번외 활동, 김희철과 민경훈)가 '한량' 이란 곡을 발표했다.
"시간이나 낚어. 난 신경 안 써. 치마폭 위에 시조나 한 수 두시고 가셔."
노랫말이 참 부럽다. 노래를 듣고 있자니, 신이 난다. 그러면서도 뭔가, 지금 시기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노래 제목이 그렇고, 내 상황이 그렇다. 더 혹독해진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한량의 행색을 하고 있는 내가 미안해진다.
월요일 아침이다. 내 남편을 비롯해서 내 지인들 역시 출근을 할 이 시간에, 밤새 한 글자 쓰고 한 글자 지우기를 반복한 덜 익은 글을 올린다. 혹여 한량이 된 나를 막연하게 부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한 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잘 채우기로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