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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Mar 06. 2021

나만 빼고 다 되는 의사소통

: 우리 집 강아지도 되는 의사소통이 나만 안 된다.

 대학생 시절, 우리 집 2층에 원어민 교사가 살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미국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우리 집의 통역사가 되었다. 참고로 내 영어 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쓰레기 분리수거 요일과 장소, 매달 나눠내야 하는 수도요금, 그 밖에 전달할 얘기가 생길 때면 나는 1시간쯤 컴퓨터 앞에 앉아 영어사전을 열어놓고 애를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너 개의 영어 문장을 쪽지에 적어 들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전달만 하는 식이었지만, 긴장되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말만 건네고는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만 빼고 다 되는 의사소통 1. 아빠


 그러던 어느 날, 아빠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학원 직원인 듯한 한국인이 원어민 교사를 대신해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옆에서 듣자 하니, 2층 보일러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이 걱정스러웠다. 상황에 필요한 문장들을 영어로 만들어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통화를 마친 아빠가 곧바로 2층으로 가보자는 거다. 네? 지금 바로요?

 아빠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어릴 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뒤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일만 했더랬다. 짧은 가방 끈이 아니었다면 뭘 해도 크게 해냈을 "무섭게 영리한" 아빠였지만,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아빠가 한글의 'ㄱ'자도 모르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겠다고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무척 걱정스러워 보였다. 서둘러 아빠를 따라갔다.

 2층 현관문을 두드리며 "익스큐즈 미"를 외쳤다. 잠시 후 원어민 교사가 얼굴을 보였다. 조금 전에 보일러 문제로 도움을 요청했을 터라, 우리의 방문 목적을 짐작하는 듯했다. 아빠가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가 보일러 스위치 앞에 섰다. 잠시 살펴보던 아빠는 다행히도 문제의 원인을 금방 찾은 듯했다.

 "아~~~!" 알겠다는 의미의 짧은 의성어를 내뱉은 뒤, 외국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빠가 이제 내게 통역을 요구하겠거니, 그러면 나는 뭐라 말해야 하나?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하나? 하지만 내 걱정은 빗나갔다. 아빠는 외국인에게 직접! 설명을 시작했다. 그 장면을 대본으로 만든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샤워를 할 때!"

 (킹콩샤워 모션: 두 손으로 샤워타월의 양 끝을 잡고 등을 씻는 듯, 팔을 위아래로 두 번 왔다 갔다 한다.)

 "버튼을 누르고!"

 (온수 버튼을 눌러서 점등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샤워가 끝나면!"

 (다시 한번 킹콩샤워 모션)

 "다시 버튼을 눌러서 꺼요!"

 (온수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작동을 멈춘다.)


* 당시 보일러는 온수와 온돌이 분리되었는데, 온수가 계속 작동 중이어서 방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아빠는 어찌나 씩씩하게 한국말을 또박또박 내뱉던지, 그리고 그토록 간단한 몸짓으로 이 모든 걸 설명하다니! 나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원어민 교사의 반응이었다. 퍽 심각한 표정으로 아빠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는, 설명이 끝나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오케이!"

 마음속에서 누군가 통역을 해주는 것 같았다.

 "아! 이제야 알겠네요! 이렇게 간단했던 것을!"

 내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마이 갓...'


나만 빼고 다 되는 의사소통 2. 우리 집 강아지


 하루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2층이 시끌시끌했다. 원어민 교사가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4~5명의 덩치 큰 백인 남자들이 맥주병을 들고 2층 난간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2살 된 수컷 코카 스파니엘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름은 "둥이"였다. 저녁 취미는 마당 뛰어다니기였다. 그날도 둥이를 마당에 풀어주고, 둥이는 '개신난' 표정으로 좁은 마당 안을 이리저리 효율적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왔는데 둥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올 리는 없었다. 둥이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린다는 건, 집에 들어가야 하거나 목욕을 하거나 털을 자르거나... 딱히 좋았던 기억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그 큰 덩치가 좁은 마당에서 안 보일 리 없었다. 더 크게 이름을 불러보는데, 아뿔싸! 둥이가 2층 계단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내려오는 거다.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엉덩이로 내 손을 재빠르고 가볍게 터치하고서 곧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당황스러웠다. 혹여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난처한 둥이다. 놀란 마음에 둥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던 중,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2~3명의 외국인에게 둘러싸여 온갖 애교를 부리고 있는 둥이를.... 사람들이 둥이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둥이는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기뻐했다. 난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너무 빨랐고, 발음도, 단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둥이가 펄쩍 뛰어올라 한 사람의 뺨을 혀로 핥았다. 침 세례를 받은 사람이 둥이에게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웃었다. 그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던 나는 알 수 없는 소외감마저 느꼈다. 잠시 후, 나는 "오, 쏘리!"를 외치며 둥이를 안고 내려왔다.

 둥아!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눈 거니?


 아빠와 둥이는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그들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영어 문법을 몰라도, 단어를 몰라도, 알파벳을 몰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무엇이 그렇게 거침없는 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내가 중·고등학교 주입식 영어 교육에 갇혀있는 동안, 그들은 자유롭고 간단한 방법으로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유일한 둥이 사진이다. 둥이가 아빠 과수원에 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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