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화

<자의적 퇴직공무원> 15.

by 이막내작가

아빠는 막내딸에게 말했다.

"널 칭찬해주는 사람을 경계하고, 너에게 쓴소리 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지혜야."

어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지혜란,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등하교를 함께했던 단짝 친구의 이름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칭찬만큼 사람을 기운 나게 해주는 게 있을까? 칭찬은 들을수록 중독되고,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쁘다" 칭찬받고 싶던 아이가 자라, 어디서든 "잘한다" 소리를 듣고 싶은 어른이 되었다.

아무 조건 없이 나의 존재만으로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건 집안에서나 가능했으니, 사회에서 칭찬을 들을 때면 칭찬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칭찬받을 거리가 있던 시절에는 나의 미숙한 욕구가 충족되었다. 부모님의 지인들을 통해 '누구네 딸이 기상청 다닌대!'를 시작으로, 직장 내에서도 소소한 칭찬들을 주워 먹으며 '제 잘난 맛'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가, 글로 먹고살겠다고 퇴직을 한 이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칭찬 가뭄이 찾아왔고, 가뭄 속에서 칭찬받을만한 콩이 잘 안 났다.


스스로도 내세울 것이 점점 없어졌다. 그럼에도 종종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내세우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과거로 달려가, 예전의 나를 데리고 왔다.


"어때? 나, 예전에 꽤 괜찮았어."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와~ 쟤가 너였어?"

혹은

"응 그래.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자랑하고 나면, 잠시나마 스스로 위안이 되었다.


낯부끄러운 자랑을 몇 차례 하고 나면,


그것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았다.

지난날의 영화(榮華: 귀하게 되어 몸이 세상에 드러나고 이름이 빛나는 것)는 더 이상 내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이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저 귀에 좋은 소리만 들으려 했던 막내는,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겸손을 배우는 인생수업 중이다. 곧 철이 들 것 같다. 귀여움만 받고 자란 막내딸이 자만할까, 혹여 겸손은 밥 말아먹은 사람이 될까 걱정했을 아빠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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