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막내작가 Aug 17. 2022

신안교 삼거리 교통섬의 남자

: 남자는 행복했을까?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교 삼거리 교통섬에 한 남자가 있었다. 한 손에 2리터짜리 빈 페트병을 들고, 팔을 앞 또는 옆으로 쭈욱 뻗었다. 또 다른 손은 어깨를 중심축 삼아 사방으로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요란한 손동작과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삼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든 자동차든 강아지든 간에 남자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흡사 신안교 삼거리의 교통순경 같았다. 페트병은 교통 지시봉이었다. 남자의 수신호를 알아듣거나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남자는 한참 동안 교차로 한복판에 서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팔이 아플 만도 한데, 남자는 즐거워 보였다. 어딘가를 보고 자주 미소를 지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종종 목격했던 12년 전의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해 보였던 남자의 얼굴이 뜬금없이 기억 속에서 떠올라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 행복했을까? 혹, 자신을 진짜 교통순경이라 믿었을까? 자신이 믿는 세계가 몹시 견고해서 현실의 차가운 파도가 아무리 철썩여도 깨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스러울 수 있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신안교 삼거리 교통섬의 남자보다 훨씬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인삼 밭의 고구마도 그렇다.

 이웃 작가님의 글에 소개되어 알게 된, '도대체'라는 필명의 작가가 그린 '행복한 고구마'다.

 어쩌다 인삼밭에서 자라게 된 고구마는 주위의 인삼들을 보고 자신도 인삼이라 생각했다. 


 고구마는 행복했다. 그런데 인삼밭에는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한 고구마 때문에 불행해진 인삼이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고구마가 너무 신경 쓰였던 인삼이, 어느 날 고구마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자신이 고구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구마가 더 이상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 컷은 다음과 같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나오는 '올라프'도 그렇다. 여름을 사랑하는 눈사람이라니... 뜨거운 여름 볕에 녹아 없어져버릴 눈사람이 여름을 사랑한다고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들이 무척 부럽다.

 올라프와, 고구마와, 교통섬의 남자가 부럽다.

 올라프처럼 글쓰기에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감히 글쓰기를 사랑한다 노래 부르고 싶다.

 고구마처럼 등단도 출간도 하지 않았으면서, 날마다 무언가 글을 쓰고 있으니 진짜 작가라도 된 줄 아느냐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직 진짜 작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행복하다 말하고 싶다.

 교통섬의 남자처럼 내 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 스스로 만족스러울 수 있으면 좋겠다.



 교통섬의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없이 오직 남자 스스로 자신을 교통순경이라 정의한다면. 그렇다고 남자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남자 스스로 행복하다면. 남자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어도 좋을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중심인 세상에서 산다. 더불어 살고 함께 교류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지극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나만의 세계'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쉽고 가볍게 부서진다. 우리 각자의 세계가 단단하고 확고하다면, 그 세계 안에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까?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리켜 미친놈 또는 나르시시스트라 불릴 수 있는 문제가 남는다. 어쨌거나...


 내게도 세상의 중심이 온전히 '나'인 시절이 있었다. 기와, 졸음과, 놀고 싶은 내 욕구만 생각해도 좋을 시절이었는데 그 좋은 시절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빨리 지나가버렸다.

 기억나지 않는 시절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저런 곳을 갔었나? 저런 옷이 있었나? 등이 기억나지 않음은 둘째 치고, 사진 속 아이가 나라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사진. 사진에 찍힌 아이를 가리키며 '이게 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게 나인지도 몰랐을 사진. 그런 사진들 중, 특별히 이 사진을 좋아한다.

 외할머니, 사촌오빠들, 엄마와 언니에게 둘러싸여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나. (네 맞습니다. 사진 속 빨간 바지에 바가지 머리를 한 아이가 저입니다. 참고로 여자아이입니다.) 사진 속 인물들의 구도하며,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들과 사진 속에서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 특히 카메라를 바라보는 내 포즈에 100점 만점을 주고 싶다. 45도 몸을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스테인리스 그릇 안에 든 무언가를 숟가락으로 떠올린 엄마, 그것이 내 입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외할머니의 표정, 그 상황이 우습다는 듯 바라보거나 밥그릇을 핥고 있는 사촌오빠들, 아랑곳하지 않고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내 언니,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처럼 서 있는... 빨간 바지에 하이바를 쓴(=바가지 머리를 한) 여 자 아 이. 

 배가 나와도 당당하고, 바가지 머리를 하고서도 부끄럽지 않고, 한글을 다 읽지 못해도 조바심 나지 않던 시절의 나는... 아마도 별 생각이 없어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자주 실망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쉽게 주저앉는 40대를 보내고 있는 요즘... 나는 코딱지 파던 시절의 자유로움을, 교통섬 위 남자의 자유로움을 종종 떠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술찌'의 와인 넘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