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먼지 팔구일 Dec 25. 2022

예기치 못한 산책

변수가 준 선물

오전 6시 24분, 3호선 무악재역에서 선로 화재가 났다.

홍제역에서 출발해 신용산을 9시까지 회사로 가야 하는데, 평소에는 넉넉히 40분 정도로 가는 길이었다.

7시 30분, 부랴부랴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한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었는데, 절대 버스를 못 탈 거 같은 비주얼의 줄이 이어져 있었다. 소방차도 지하철역 앞에 와 있어 홍제역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팀장님께 상황을 문자로 말씀드리고,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택시를 잡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동네 샛길로 빠져나가는 마을버스가 보였다. 거기 버스정류장에는 줄이 길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으나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는 마음으로 무작정 버스를 탔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타는게 맞는 건지, 그렇지만  출근하는 사람들로 줄은 하염없이 길어지지만, 만차상태로 바로 출발해버리는 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마을버스는 일단 아파트단지쪽으로 들어갔다가 동신병원 사거리라는 시내 쪽으로 빠져나갔다.

동신병원 사거리에서 회사로 가는 경로를 찾아보았다.

지하철과 달리 버스는 역이 비슷한 곳들이 여러 곳들이 있어 해당 버스가 있는 정류장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거기에다 나는 길치다. 일단 내리고, 눈에 보이는

다른 버스 정류장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들이 여러곳 보였지만 신용산을 향해 갈만한 노선은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길을 건넜고 또 다른 마을 버스를 보았다. 오, 그 마을버스는 신촌역을 향해 가는 버스였다. 아는 길이었다. 세상 다행이었다.


2호선 신촌역에서 가다가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용산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찾기 어플은 그렇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길눈이 어두운 내가

버스를 2번 갈아타고 그곳들의 버스정류장을 찾는 건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두 번째 마을버스는 연세대쪽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정체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안되겠다싶어 연세대학교에서 내렸고 신촌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침 8시 20분 경의 신촌은 문 하나 연 가게 없이 한산하고 조용했다. 독수리 다방, 알라딘 서점, 인생네컷 사진관을 보니 무언가 풋풋한 시간이 기억났다. 그리고 붉은색 벽돌 건물의 교회를 보니

마음 한 켠이 평화로워지는 듯 하였다.


나는 신촌역에서 용산역까지 지하철을 탔고, 내려서

회사까지 걸어갔다. 회사에 도착하여 업무 PC를 켜니

8시 55분, 세이프였다.


1시간 20분이 넘는 출근길이었다. 평소보다 절반이나 길어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좋았다. 잘 모르는 마을버스 두 번을 갈아 타 젊음의 거리를 걸어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그 길 하나하나에 예기치 못한 기쁨이 있었다.


나는 매너리즘에 잘 빠진다. 변수를 싫어하고 내가 생각한 절차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고, 조급해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못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이 새로운 출근길은 뭔가 리프레시를 하게 한 경험이었다. 평소 갔던 길보다 한적했고, 어렸을 때 갔던 곳도 오랜만에 보고, 새로운 건물들을 보고 걸어가는 게 좋았다. 혼자 걸었던 길이지만 마음 속에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_유진 피터슨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송태근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문장이다.

어쩌면 나는 그 날 아침 예기치 못한 산책과 함께 성숙의 문을 열어보았던 건 아닐까? 참 조용하고 따뜻하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사도>, 죽음의 문턱에 와서야 닿는 마음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