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 죽음의 문턱에 와서야 닿는 마음에 대해
마음으로 살고 싶은 아들, 법도로 세상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이 무너지는 순간, 놀란 마음은 딸꾹질을 멈추지 못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아픈 건, 그로부터 마음을 다쳤다고 해서 쉽게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에게 따뜻한 눈길과 사랑한단 말 한마디를 마음 어디선가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있다.
영화 <사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실망하고, 미워하고, 가슴으로 묻는 부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관람객의 영화 평가가 많은 공감이 되었다.
보통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 그 다음 왕 정조와 연관하여 그린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담기 위해 힘썼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단 게 그 내용이다.
영화는 사건의 긴박함과 기승전결의 구도로 긴장을 높여나가는 방식이 아닌 사도세자가 8일동안
뒤주에 갇힌 그 시간을 따라간다. 뒤주에 갇히는 것을
결론이 아닌, 영화의 시작에 이미 배치함으로써 이를
카타르시스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는 걸 배제한 것이다. 이는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평범한 일상을 따라가는 구조가 생각나게도 했다.
영화를 보며 이준익 감독이 역사를 상당히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다루려고 하는구나, 몇 백년전의 이야기 임에도 그 시간의 당사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이 영화를 본다는 걸 전제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9년 전에 영화 <소원> 시사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준익 감독이 실화를 다루는 데 조심하고, 자극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소재는 언제나 한국을 향하고 있고, 당대의 아픔을 담담하게 담는다. 그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철저히 관객수로 평가받는 영화계에서 이러한 태도로 영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건 깊은 용기와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점점 미쳐가는 세자와 아들을 엄격하게 대할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마음이 드러나는 어긋남을 아주아주 천천히 담았다.
사이코패스, 가스라이팅이라고만 생각했던 영조의
행동, 그 근간에는 정말 자식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게
반전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반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만큼 자연스럽게 담았다. '사도세자'라는 이름 안에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지키고 사랑하려고 했던 안타까움이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입장이 다양해 역사왜곡의 논란이 많을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은 당대 영조와 사도세자에 철저히 집중하는 치열함을 선택했다.
또한 실제로 수십 수백의 사람을 죽여 쉴드를 치기 어렵다고 하는 사도세자의 삶을 드러내는 것 또한 영화는 훌륭하게 해낸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의 떳떳함"이라는 단어와 오브제는 사도세자의 상처와 아버지의 세계에서 지지 않으려는 나름의 고결함을 담는다. 영화 후반 '아비의 마음을 보았다'는 어린 정조의 대사를 통해, 법도와 예절로 눌린 사도세자의 아픔과 이를 벗어나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마음이 사랑이라고만 해서 모든 것이 용납될 수 만은 없겠구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 마음 만큼 중요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사랑이란 게 얼마나 하찮고 나약할 수 있는지, 사랑이라 부르는 그 마음이 진정으로 다가가지 못할 땐 상대를 뒤주에 굶어죽게 하는 잔인한 결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날마다 경계하고, 생각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걸 연습해야겠다.
그러다보면 때로는 아픈 사랑이어도, 그 마음을 볼 줄 아는 만큼은 자라 있지 않을까 ?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을 조금 더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