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잊는 삶
세상을 살기 위해 인간은 많은 것들을 잊고 산다.
꽁꽁 감춘 상처는 어느 날 여전한 통증을 봐달라 소리내기도 하지만 기억은 보기보다 무심하다.
스즈메는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던 4살, 3월 11일의 일기장을 새까맣게 칠해버린다. 분명 지금도 마음 속을 헤매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무엇인진 자신조차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단단하고 무거운 마음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느낄 뿐이다.
폐허로 가며 시작된 여행
폐허를 마주한 순간, 열여덟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소타가 동네의 폐허가 어딘지 묻는 그때 스즈메의 마음은 단숨에 사랑으로 향했다.
'교복', '도시락', '자전거'란 오브제는 뚜벅뚜벅 일상을 성실히 살아온 스즈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소타와 만나며, 학교를 뛰쳐나와 폐허로 향한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타를 만나기 위해서.
스즈메는 소타가 세 다리의 의자로 변하자 이를 해결할 고양이 다이진을 찾기 위해 동행한다.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라는 장거리 여행이 시작된거다.
이 여행은 일본의 도시들, 그리고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 선배의 차안에서의 일본 가요와 같은 오브제들로
평범하면서도 잔잔한 일본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일상을 함께 하는 위로
영원히 돌이 되어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폐허의 문을 열 용기가 있을까? 여기서의 폐허란 죽음과 비슷한 맥락이다.
폐허가 죽음보다 잔인한 점은 영원히 굳은 몸의 상태로 돌이 되어 다른 인생들에게 일어날 재난을 막아야 한다는 거다. 영원히 맨홀로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스즈메는 폐허로 향할수록 이웃의 이야기와 일상의 어려움을 도와준다.
떨어진 귤을 주워주고, 워킹맘을 위해 그의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함께 동참한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스즈메가 이웃을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이 아니다.
시코쿠, 고베, 도쿄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재난의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내가 아는 일본인은 타인의 도움을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잘 담아냈다.
처음 교복을 입었다 시코쿠를 떠날 때 사복으로 갈아입은 스즈메, 그러다 다시 도쿄에서 교복으로 입은 모습에는 결국 스즈메가 돌아가야 할 일상과 삶이 있다는 걸 상징한다 보았다. 다만 소타의 신발을 신는 스즈메는 그가 이전과는 다른 마음과 방식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걸 암시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문 하나와 문 바깥 고작 한 걸음 차이 밖에 나지 않으며,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 믿는 정령사상이 설득력 있게, 아니 아름답게 묘사한다.
사상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스즈메의 용기와 결단이다. 죽음의 여부와 관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는 '마음'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랑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감독의 깊이에 감동하였다.
사랑은 무거움, 공기, 내일, 일상, 경계, 생명, 책임, 아름다움, 기억, 기록이다. 사랑하면서 용감해지고, 결단하고, 이기적인 자아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