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언어로는 미처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마주한다. 적합한 예일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산 없이 흠뻑 비를 맞았다. 돌아온 빈 집, 혼자 성경동화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누워 있던 그 순간은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기억난다. 그런데 지금도 생생한 그때의 마음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외로웠으나 따뜻했고, 사람이 그리우나 이상하게 채워진 것 같은 나만 아는 마음이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보며 '나만 아는 마음'이라 생각했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어린 아이 둘이 버스 정류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아빠를 기다리는 장면, 병원에 입원한 엄마에게 몸에 좋다는 손수 딴 옥수수를 전해주려는 아이의 모습들 말이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채워줄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 울음이라 표현할 수도, 슬픔이라고만은 부를 수 없는 그 감정이 심플하게, 그러나 정확한 장면으로 펼쳐진다.
토토로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뿌렸던 씨앗이 단숨에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는 잃어버린 여동생 메이를 찾아준다. 여기서 토토로는 해결사가 아니다. 아이들이 표현할 수 없지만 견뎌야 하는 삶의 한 지점,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의 시간에 동행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이웃이자 친구다.
사람은 외로움을 머금으며 어른으로 자라난다.
(어른으로 자라난다는 표현 또한 부족한 언어의 단면이라고도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무시한 채 일단은 쏟아지는
비를 맞아야 한다.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한 시간이
마음 속 아이의 그림자로 남아, 자신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언어 한 줌을 쥔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