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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 팔구일 May 15. 2024

[단편] 미안한 마음 (완결)

장초하는 로또수령금 23억원이 통장으로 입금된 걸 확인하자마자 퇴사를 선언했다. 장초하 한 사람이 갑자기 빠지면 이번 달 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다른 직원들이 이번 달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다. 팀장은 한 달만 더 버텨달라고 장초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장초하는 그건 자신의 사정이 아니라고 매몰차게 말하려 했지만, 팀장의 눈빛에서 막막함과 공포가 가득함을 보았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초하는 이번 달까지라고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한마디 하고선 자리로 돌아왔다. 하주리는 그런 장초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장초하는 콜수를 맞추는데만 신경썼다. 고객이 아무리 험한 소리로 말을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통장 금액을 아침마다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아침은 평안했다. 통장의 힘은 장초하를 쫄지 않게 만들었다. 고객의 험한 말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다. 장초하의 실수로 고객이 화가난 상황에서도 말이다.


“네, 고객님 제가 이자금액을 잘못 안내해서 혼돈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금감원으로 신고한다는 고객의 말에도 장초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납이자는 매일 오른다. 

특히 이자에 이자가 쌓이면 이율은 더 올라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항상 상담할 때는 ‘오늘 기준 이자’라는 말을 해야 한다. 

장초하는 고객이 이자금액으로 삐딱하게 나왔을 때 미납이자 금액이 오늘 기준이란 말을 덧붙이면 고객이 화를 낼거란 걸 직감했다. 

고객은 같은 안내를 반복해서 요청했고 상담 시간은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장초하는 고객에게 다음에 전화해서 안내받으라고 말하고 통화종료했다. 다음 통화 때 이자금액은 더 늘어나 있을텐데, 다음 상담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을 전화일텐데 장초하는 굳이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 상담 때 안내 맏으시면 됩니다”라는 장초하의 또랑또랑한 음성은 경쾌했고, 하주리는 뚫어져라 장초하를 쳐다보더니 상담내용을 입력했다. 하주리의 키보드 소리가 유독 컸다. 엔터키를 칠 때 온힘을 다해 내려치자, 팀장은 하주리를 향해 갔다. 

곧 신입 상담사들을 뽑을테니 조금만 힘내라는 말을 건넨 팀장 앞에서 하주리는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요” 터벅터벅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탁한 담배냄새가 풍겨온다. 장초하는 미간을 찌푸린다.


신입 상담사들이 들어왔다. 5명의 신입 중 한 명만 정착해도 성공이다. 문제는 하주리였다. 그는 신입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했고, 신입이 물어봐도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한번은 신입이 그가 전화 응대하는 걸 들으려고 앉았을 때였다.


“저한테 담배냄새 나죠?”

“별로 안나요. 괜찮습니다 선배님”

“나 여기 오기 전까지 담배 안피웠어요.”

“네?”

“도망칠 거면 지금 가요. 여기 발목 잡히면 답이 없어요.”


장초하는 그런 하주리가 같잖았다. 

상담일 고작 6개월밖에 안한 자신도 신입인 주제에 산전수전 다 겪은 상담사 코스프레를 하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신입이 전화 응대하는 걸 들으며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면 책 잡혀요. 당신은 죄송하다고 하는데, 다음 상담사는 죄송하다고 안하면 다음 상담사를 무례한 사람 취급한다고.” 틀린 소리는 아닌 가이드지만, 윽박지르듯이 화내면서 신입을 대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히게 했다. 장초하는 참을 수 없어 하주리의 행태를 팀장에게 말했고, 팀장은 한숨을 쉬더니 곧 전체 메신저를 보냈다.


<이번주 목요일 저녁, 회식합니다.>


고기를 마주하고 앉은 하주리와 장초하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우걱우걱 고기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하주리는 적어도 오늘 통화한 고객 수 만큼의 고기조각을 먹어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벨을 누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법카를 들고 있는 팀장님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장초하는 화장실에 갔다 오며 지금까지 먹은 금액을 확인했다. 45만원, 회사 지원 예산보다 25만원의 돈을 더 지출하게 된 상황이었다. 장초하는 자신의 카드를 건네며 30만원 선결제를 했다. 조용히 이 회식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떤 선의도, 누군가를 향한 동정도 아니었다. 

팀장은 고마운 눈빛으로 장초하를 바라보았지만 장초하는 외면했다. 8명의 팀원이 식당 앞에서 인사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와 마주칠세라 장초하는 반대편, 자신만 아는 샛길로 향했다. 

조금 더 걸리더라도 다른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갈 셈이었다. 혼자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뒤에서 하주리가 큰 소리로 장초하를 향해 말했다.


“잘가라 이 치사빤스야.”


분명히 하주리는 술을 안마셨다. 그런데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장초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였다. 내일만 일하면 콜센터는 그의 인생에서 아웃이다. 그때 핸드폰으로 팀장이 고맙다며 스타벅스 커피쿠폰 6500원을 보냈다. 장초하는 그길로 스타벅스로 향했다. 인당 39000원짜리 텀블러 8개를 샀다.


장초하는 출근하자마자 팀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책상에 구매한 텀블러를 하나씩 올려놨다. 

장초하는 자기 텀블러를 갖고 탕비실로 향한다. 

마지막 얼음이다. 힘차게 주걱으로 얼음을 퍼 텀블러에 담았다. 장초하는 초록색 바탕의 인어를 본다. 

인어의 눈은 초록색으로 채색이 돼있다. 

눈의 형체는 있지만 눈망울은 없다. 이곳에 있던 자신의 모습 같았다. 

은자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퇴근하기 전 재활용 쓰레기통에 텀블러를 버리고 가야겠다. 

구질구질한 시간이 담긴 물건을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콜센터는 더 이상 장초하와 상관없는 곳이었다.


하주리는 텀블러 포장을 풀더니 책상에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9시 10분, 콜 업무가 시작된다.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치졸한 싸움은 앞으로도 이어질 거였다.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 무렵, 장초하는 하주리로부터 메신저를 받았다. 

“고생만하고 가시네요 선배님”


장초하는 선배라는 단어가 걸렸다. 이곳에서 일했던 기억하고 싶지 않고, 어떤 이와도 관계 맺지 않으려 했다. 장초하의 이런 소거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겐 또 다른 소외였다. ‘전화 받는 일’이라 하찮은 일이라 치부하는 무시와는 다른 ‘존재를 외면하는 일’ 말이다. ‘나는 이런데서 일할 사람이 아니야’ 이런 데서 일하는 건 어떤 것이기에 저런 데서 일하는 당신은 얼마나 귀한 일을 하고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데서 일하는 하주리는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하려 했고, 장초하는 살아남기 위해 고객 앞에 자신을 낮추며 매일 가면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초라한 가면을 벗으니 행복할 뿐이었다. 얼른 태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장초하가 이런 데서 일하는 가면을 태워버리는 순간, 여전히 이런 데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거되고 삭제된다. 장초하는 퇴근 때까지 하주리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텀블러를 가방에 넣는다. 언제 한 번 밥 먹으러 올게요, 자신의 전화번호를 하주리에게 건네고 퇴근한다. 이곳을 떠난다고 했을 때부터 올라왔던 이상한 미안한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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