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현대인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지고 있는 자기 계발서, 처세술,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어쩌면 쓸데없이 감상적이기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에 어떠한 희망의 빛도 교훈도 없고,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고 담백하여, 읽고 난 뒤에는 ‘허무함’ 만이 맴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그 어떤 자기 계발서도 나와 있지 않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엇’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것은 고등학생 시절,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였다.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이 소설이 싫었다. 거북하고 혐오감마저 생겼다. 너무 어린 탓이었을까. 그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가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은 ‘기피 소설’로 분류되어 그의 신작이 그 어떤 훌륭한 평가를 받아도 일체 손대지 않았다. 그러다 이십 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의 소설을 다시 읽을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전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하루키의 대한 감정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그 후 ‘태엽 감는 새’에 이르러서야 겨우 하루키 소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결국 완결까지 읽지는 못했으나, 소설의 첫 부분에서 매료되어, 홀린 듯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일본어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접한 『토니 타키타니』는 그동안의 견해를 뒤집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이 기회를 통해 서툴게나마(그리고 여전히 개인적인 견해로) 『토니 타키타니』를 읽은 후의 소감을 하나하나 되새김해볼까 한다.
소설 초입 부분은 토키 타키타니의 탄생으로 이어지기까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아버지 대부터,
그가 얼마나 고독한 환경에서 태어났는지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설명들이 토니 타키타니가 정말 고독한 사람이었을까? 하고 반문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토니 타키타니의 고독을 대하는 태도는 ‘유전이 분명해’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갖게 했다.) 하루키는 사실적으로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그의 환경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가 외롭고, 고독하고, 얼마나 슬픔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읽고 있는 ‘우리의 관점’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많은 것을 결핍된 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로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히 하는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아마 고독이 무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결핍과 고독을 안겨줄 일대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등장이다.
「 나는 그 무렵 처음으로 활자화되어 세상의 햇빛을 본 나의 첫 글 ‘해후에 대하여’에서
‘우리는 일찍이 어렴풋 보던 것을 해후에 있어 뚜렷하게 보는 것’이라고 적어 보았다.
밖에서의 ‘만남’에 앞서 안에서의 ‘바람(所望)’이 있다.
나는 아무나 만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던 사람, 그리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그이’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는 어렴풋이 밖에는 모른다.
그이와의 ‘만남’이 비로소 내 안에 있던 나의 ‘바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참된 ‘만남’이란 내 안에 숨었던 나의 ‘바람’을 들춰보여 주는
그러한 만남이다.
- 최정호의 “사람을 그리다”中 」
토니 타키타니는 그녀를 사랑하고 결혼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고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이 많은 것을 상실하고, 고독한 채 살아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결핍’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결혼 초반, 그는 혹시나 이 행복이 사라질까 하는 불안에 휩싸여 버린다. 그녀가 없을 때에는 아무 탈 없이 흘러가던 그만의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외롭지 않아야 하는데 전보다 더 고독해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니 타키타니가 사랑한 그녀는 집안 환경이 좋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사 분별력 있는 현명한 여자였다. 또 옷맵시가 뛰어나 마치 그녀로 인해 옷들이 생명을 띄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병적으로 옷을 사들였는데 옷이 앞에 있으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결국 옷을 돌려주러 갔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어버린다. 여자는 왜 그렇게 옷에 집착했던 것일까?
현대 사회는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다. 뿐만 아니라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이 배고픔이 뭔지, 결핍이 뭔지 모른 채 살아간다. ‘소유욕’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결핍으로 인한 소유욕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타인을 위해 갖고 싶은 것인지, 자신을 위해 갖고 싶은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이 계속되고 욕구는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고 있음을
돌이켜보면,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질은 풍족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그것이 마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고독하지 않다고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끊임없이 만나고, 소비하고, 사랑한다.
자신 내면에서 들리는 텅 빈 소리를 듣지 않으려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의 일종이라고 자기 합리화한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내면은 얼마나 고독한가. 그렇다면 고독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소용없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물’에 갇히는 방법 말이다. ‘태엽 감는 새’에 우물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주인공이 깊은 우물 속에 스스로를 가둔 부분을 제일 좋아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
우물에 대한 견해는 딱히 하루키의 팬으로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내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대인이 고독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소비하고 탕진하여 자신을 채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자신이라는 우주를 헤매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우리가 진정한 의미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일까?
「 요즈음 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
뭔가를 말하려 해도 늘 빗나가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야.
빗나가거나 전혀 반대로 말하거나 해.
그래서 그걸 정정하려면 더 큰 혼란에 빠져서 빗나가 버리고,
그렇게 되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쫓고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복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 있어서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꼭 알맞은 말이란 늘 또 다른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게 돼.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 」
「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로운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中 」
내면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아무리 사랑하고, 만나봐야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스치지만, 진정 타인과 소통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타인을 이해했다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고 사실은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시인 최영미는 『행복론』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아내가 죽고,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토니 타키타니가 외톨이로 남겨졌다며 소설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 뒷모습이 마지막까지 외롭고 고독할까, 하는 의문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사랑을 해봤던 가슴은 전과 같지 않아서 지독하게 외로운 삶을 살다 갈 것인가. 아니면, 시간에 무뎌져 전처럼 고독이 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삶을 살다 갈 것인가. 후자였으면 하는 바람은 고독을 이겨내는 방법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할까. 마지막으로 진정한 사랑과 소통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어쩌면 평생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마 현대인뿐 아니라, 과거에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함민복 "선천성 그리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