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동산의 소중함
우리 동네는 작지만 주변에 산이 많다.
나름 유명한 산부터 이름없는 자그마한 산도 있다.
작지만 느긋하게 오르기 좋은 이 산의 이름은 봉화산이다.
예전에는 이 산 근처에 '빠박산'이라는 이름의 언덕이 있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붉은 모래가 뒤덮여 있는 언덕배기 하나가 덩그러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산의 입구에 있었다.
이곳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미끄러워서 끝까지 올라가기 힘든 그 비탈길을
굳이 역주행해서 올라가서, 미끄럼틀을 타고 슝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놀이였다.
어린시절의 나는 겁이 많아서 이 언덕을 끝까지 올라본 적이 없다.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싫고 무섭지만 미끄럼틀은 타고 싶어서
늘 다른 루트의 능선을 타고 꼭대기에서 타고 내려왔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려갈 때마다 거꾸로 역행하는 무리들과 부딪히기 일쑤였으므로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었지만, 미끄러져 내려오는 즐거움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빠박산은 시간이 지나니 빌라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놀이터는 포장도로로 바뀌고, 신나게 뛰어다니던 좁은 골목길엔 빌라가 들어섰다.
익숙한 듯 낯선 이 골목들은 아직도 가끔 돌아다닐 때마다
아 여기 왠지 알 것 같은데, 싶은 이상한 여운을 남긴다.
주말에는 봉화산을 산책했다.
나같은 운동부족, 작심삼일에게 오르기 좋은 산이다.
왕복 1시간 이내에 정상까지 찍고 내려올 수 있다.
최근에는 둘레길이라고 해서 2시간, 3시간씩 돌고 돌아 정상으로 가는 코스도 생겨났지만
도전해본 일은 없다.
내가 아는 봉화산의 루트는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보고 직진하고
내려갈 때는 길을 헤매면서 발길 닿는대로 무작정 걸어대는 것 뿐이다.
신기하게도 그냥 길일 뿐인데 헤매다 보면 반드시 어디론가의 출구로 나오게 된다.
그 출구들은 결국 동네로 다 이어져 있어서 길을 잃을 걱정이 없는 것도 좋다.
어릴 땐 이 산에서 약수물도 마셨고, 산딸기도 따 먹었다.
중턱에 있는 배드민턴 장에서 신나게 배드민턴을 치고 놀았던 기억도 있다.
곳곳에 있는 방공호는 우리에게 술래잡기 장소였다.
무서운 이야기와 함께, 방공호에 숨어 있다보면 오줌이 찔끔 나올 정도로 긴장하기도 했다.
중턱에는 모래와 바위만 있는 장소가 있는데 나름 흔들 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윗돌도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 산이 나의 놀이터였는데 지금은 건강을 위해 오르고 있다니...
어릴 때는 운동조차 놀이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죽지 않기 위해 오르게 되었다는게
믿기지가 않는다.
오르다보니 빨간 등산복의 아주머니 무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려오셨다.
- 남들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습겠어
아뇨. 아뇨. 아주 대단해 보이십니다.
상하의 빨간색 등산복에 등산가방을 메시고,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장착하신 모습이
늠름한 여전사들 같으셨다.
왜 산은 나이드신 분들이 오르실까. 젊은 사람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대다수가 50-60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시고
그 이상의 연배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뿐이었다.
가끔가다 개를 산책하는 가족들이 보이고, 나처럼 건강증진을 목적삼아 온 아가씨 한명.
들리지 않게 속으로 응원해본다. 힘내봐요, 우리
30분 가량 오르막길과 계단이 번갈아 나온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걸어올라가다보면
정상에 있는 봉화대가 나온다.
마을의 전경이 보이는 정상에 오르니,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이 먼저 보였다.
아, 마스크 쓰고 나오는 건데...
마실 물도 안가지고 나온 초보 등산객에게는 휴식을 즐길 시간 따위 없다.
바로 다시 하산을 준비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하산할 때는 항상 다른 루트로 내려오게 된다.
일부러 그러는건 아닌데 살짝 방향치, 길치끼가 있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대부분을 헤매다가 겨우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득, 중학교 백일장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어릴 때 난 나름대로 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백일장에 장원이 내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누가 장원이냐고 따지러 교무실에 간 적이 있다.
차마 내가 1등이 아니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는 속내를 비치지는 못하고
슬그머니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께서는 왜 네가 장원이 아닌지 확인하러 왔니? 라며 내 검은 속내를 단박에 알아차리셨고
장원을 받은 아이의 글을 보여주셨다.
충격이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목과 글의 분위기를 아직 기억할 정도였다.
내 발 밑의 현자, 라는 제목으로 길에 대한 글이었다.
같은 주제인 '길'로 글을 썼던 내 글과는 아예 급이 달랐다.
유치하고 동화적인 내 글에 비해 이 아이의 글은 정말 수필 그 자체였다.
어른스러웠지만 현학적이지 않았고, 삶에 대한 깊은 철학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동갑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항상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길바닥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있는지, 인내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이었다.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아이가 장원이라는 사실에 깊이 수긍하며 돌아왔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등산이 취미가 아닌 내가 언제 와도 길을 헤매지 않도록 이 길을 닦고,
중간 중간 리본으로 표식을 해둔 사람들의 손길이 보였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 이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산을 먼저 사랑했던 이가
모두를 위해 닦아준 덕분이었다.
내가 미끄러지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이유도, 길치인 내가 길을 헤매지 않고 정상까지 도달하는 이유도
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 덕분인 것이다.
사랑이란, 정말 대단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게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갔다.
많은 분들이 생각났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 내가 지금 목표로 하고 있는 직업적 멘토들,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때론 길을 잃어도 헤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어느 곳을 딛어도 그 곳에 처음 온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다시 길을 돌아가라고, 그쪽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조용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나무둥치에 묶인 작은 리본 하나가 헤매는 나에게 그 누구보다 가장 정확하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등을 보여주고, 자그마한 표시등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처럼 이 길에 들어와 헤매일 때
작게 반짝이는 표시등 하나로 혼자가 아니었구나,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하고 위로받을 수 있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존재들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만의 길을 나아갔던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며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