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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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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잼 Sep 08. 2023

계절을 지나는 비

5월의 여행

내가 맨 처음 사랑한 건 그의 등이었다. 


넓고 단단한 어깨 밑으로 돋아난 날개뼈, 그리고 세월이 둔하게 했으나 분명 젊은 시절 날렵했을 허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등은 그간의 세월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의 등은 딱쟁이가 떨어져 나가고, 그 위에 또 딱쟁이가 내려앉았다. 

쓰다듬어도, 긁어내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무뎌진 것인지, 참는 것인지 이제는 이골이 나서 생각조차 포기했는지. 

아무리 쓰다듬고 달래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그 흉터들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정글을 지나는 유일한 활로처럼.

그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이 모든 상처를 피하고 견뎌야만 하는 걸까. 

딱쟁이 사이를 지나는 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유일한 길에서 방황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그는 내가  지도를 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도 내 눈앞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등을 쓰다듬는 것은 허락했으나, 등을 보이기는 원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등을 보여달라고 조르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상처가 될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에게 매달리며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길을 짐작하고는 했다. 

이쯤일까. 아니면 이쯤일까. 

어떻게 해야 너에게로 가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잠잠히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쓰다듬는 손길에 그 상처가 녹을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여태껏 상처를 참고, 괜찮다고 말해왔을 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닐 리가 없어,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입버릇은 아무 생각 없어,였다.

우리는 마치 서로 마주 보고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파트너처럼, 항아리가 넘쳐흐르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매일매일 넘쳤다. 

그에 대한 생각도, 나에 대한 생각도, 우리에 대한 생각도 매일 넘쳐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의 항아리에는 내가 부어놓은 물만이 가득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 일에 흥미를 잃었다. 

나의 열정이 그를 식게 했을까?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을까?

덕분에 항아리가 넘쳐흐를 걱정을 덜었다. 


나의 힘만으로는 항아리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둘이 해야 할 일을 혼자 다 해내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난 이 항아리를 절대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채울 마음이 없다면, 이 항아리를 깨버리자고 했다. 

그는 조용히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항아리가 깨졌고, 남아 있던 마음이 그 틈을 타고 버려졌다. 

다 채울 수 없었을지언정, 그 물을 부었던 내 진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테니. 

얼마간은 흘러가는 물 위에 눈물을 더했다. 

어차피 버려질 것이니까. 어차피 버려질 마음이니까. 

이 정도 애도는 괜찮겠지.


금기를 범하고 싶다.

모든 글에는 내가 드러나면 안 된다. 

그런데 난 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내가 이랬어, 저랬어, 온통 나로 가득한 글을 써 내려가보고 싶다. 한 번도 나를 온전히 드러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비난을 견뎌야만 하는가. 

숨기지 못했다고, 숨길 수 없었다고 그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이유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다 드러내고 한 번에 버려버릴 것이다. 

나에 대해 모든 걸 폭로한 뒤, 새로운 내가 될 것이다. 

항아리를 비우듯, 온전히 털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다시 나를 채워볼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별할 때마다 난 습관처럼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었다. 

모자란 감성을 채우는 듯, 상실의 여운을 길게 꼬리 잡아 늘리려는 듯.

주인공과 스미레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난 그 장면에서 별안간 그를 떠올리고 통곡했다. 

우리가 함께 앉았던 벤치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웃었고, 그의 은밀한 취미를 공유했고, 그리고 이별했다.


이별하는 날,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만났던 날 그랬듯, 덤덤하게 웃으며 보내주고 싶다고 그런 말로 이별했다. 

그는 조금 불편하다고 했고, 이제 그만 가자고 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문자로 알려왔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제 더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기에.

한때는 너무 갖고 싶던 그가 가장 아끼던 모자를 돌려줬다. 

하나쯤 그가 쓰던 걸 품고 싶었지만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모자에는 그의 체취가 너무나 진하게 묻어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 그 모자를 쓰고, 그를 그리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를 사랑하는 것도, 그를 떠나보내는 것도, 그리고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내 모습도.

나를 마주하지 않는 그의 옆모습은 처음과 같았다

그래서 더 실감 나지 않는 이별 장면이 되었다. 

나는 이제 사랑을 하는 건지, 이별을 하는 건지도 구별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고작 한 달이었다. 

감정이 깊어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잊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의 시간. 아니, 차라리 없었던 걸로 치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 한 달. 

사람이 한 달 안에 얼마나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진화를 이뤄냈다. 

사랑이 깊어지길 원했기 때문에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을 놓친 것도 몰랐다. 

넌 너무 급해. 나에 대한 그의 코멘트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힘을 빼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마치 선생님이 어린 학생에게 처음 호흡하는 법을 알려주듯. 

천천히, 느긋하게 호흡하라고. 

그리고 긴장하지 말라며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 배움은 고작 한 달이었다. 


뜨거운 불덩이를 주고받는 것 같았던 캐치볼은 공기를 할퀴는 허우적거림으로 변모했다. 

변질되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변해갔다. 빠르게 시작하고, 빠르게 변해갔다. 

너무나 신선한 것들은 유통기한이 짧을 수밖에 없다. 

갓 짜낸 신선한 우유처럼, 3일이면 상해버려 먹었다가는 큰 탈이 나는 음식처럼, 빠르게 빠르게. 

유통기한이 없을 것 같던 사랑의 시작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의 낮은 그에게 밤이다. 

그의 밤은 나에게 낮이며, 그의 낮은 나의 밤이다. 

우리는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 그는 나의 어제를 살고 있다. 

나는 어젯밤에도 그를 떠올리며 울었다. 

그가 나를 기억할까 궁금해하며, 그리움이 온몸 구석구석을 핥았다. 

기억나지 않는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내고, 그의 체취를 기억하려 킁킁거렸다. 

체취는 이미 온데간데없는데, 기억만으로 그의 체취가 머물러오는 듯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해 낸다. 

그의 뼈 마디를 기억해 낸다. 

보물지도 같던 그의 흉 진 등을 떠올린다.

 아, 이쯤 어딘가. 그에게로 향하는 길이 있을 것만 같은데. 

그의 날 선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 푼수처럼 웃던 순수한 웃음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매일처럼 맞잡았던 그의 손을 떠올린다. 

그의 손목, 힘줄, 종아리와 발목, 부드러운 발과 내 마음에 꼭 들었던 콧대. 

그리고 부드럽던 입술. 다정한 목소리. 장난치던 모습. 피곤해하던 눈. 

그 모든 것이 애틋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원망스러운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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