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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개 : '폭싹 속았수다'

40대, 흔들리며 피어나다.

by 라이언윤

세상에는 두 가지 방식의 가르침이 있다. 하나는 밀림의 법칙,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사랑이다. 밀림에서는 새끼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 뒤, 그다음부터는 각자도생이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다. 우리는 자식이 충분히 자라기 전까지는 떠나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니, 사실 충분히 자랐다고 해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은 것을 쥐여주려 하고, 더 오래 함께 있으려 한다.


“아직 안 컸어. 더 키워 놓고 가. 왜 이렇게 빨리 가려 그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금명의 말은 응석이지만, 경제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모와 자식의 비효율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과거에는 자식이 곧 노후 대책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며 미래를 맡겼고, 자식은 성장해 부모를 부양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식은 더 이상 부모의 노후가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노후를 희생하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할수록 시대적 반항아들이 생겨났고 이는 저출산으로 항의하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는 21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후기에도 인플레이션이 심하고 자식 키우기 힘든 상황 일 때는 무조건적 사랑의 형태의 변질인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지금 우리는 자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리 준비해주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자식 농사조차도 경쟁에 지친 나머지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 오랜 시간 자연에서 벗어나 있었던 건 아닐까? 동물들은 새끼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홀로서기를 시킨다. 반면, 인간은 자식을 독립시키기보다 품 안에 더 오래 두려 한다. 인간의 키움이란 언제 까지란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역설적으로 사실 자식이라면 끔찍하다. 흔히 결혼을 고민하는 후배들이나, 자식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면 난 거침없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딸이 있기 전에 나의 행복의 만점이 '100점'이었다면 지금은 '200점'이라고"


다윈의 진화론 내용 중 희생적 번식, 자연선택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곤충 중 일부는 후손을 위해 극단적인 생존 전략을 취한다.


예로 들어 기생벌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다른 곤충의 몸속에 알을 낳고, 태어난 유충은 그 숙주를 먹으며 성장한다. 어떤 곤충은 자신을 자식의 먹이로 제공함으로써 생존율을 높인다.


인간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닮아 있지 않은가?


자연선택은 개체가 아닌 유전자 단위에서 작동한다고 한다. 부모 개체가 희생하더라도 후손이 살아남아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면, 그 전략은 진화적으로 유리하다. 결국 부모의 희생은 단순한 감정적 헌신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새겨진 유전자적 명령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드라마 속 오애순을 보며, 비록 드라마의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고, 세대 간 치열한 삶이 어떻게 자식에게 손자에게 전달되어 덕을 쌓아 가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16부작 속에서 가족의 사랑과 헌신이 만들어낸 눈물과 드 넓은 웃음의 바다를 선사해 주어 감사했고, 옛날 기억들도 떠올랐다.


또렷이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욕심 가득한 나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는 “엄마는 왜 일하러 안 가? 친구들 엄마는 다 돈 벌어 오는데.”라고 말했던 거 같고, 또 아버지에게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남들처럼 큰 집으로 이사 안 가?”라고 말하며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냈던 거 같다.


그렇게 철없던 내가, 이제 아버지가 되었고,

내 DNA가 우리 딸에게 갔는지,

출근하는 나에게 매일 같이 말한다.


“돈 많이 벌어 와."

"왜?"

"장난감도 사고, 예쁜 옷도 사고” (수줍게 웃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엄마는 나지막이 한마디 던진다.


“느 딸내미가, 나 아들내미보다 위여, 위.”


‘부전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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