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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어린 시절 친구와의 추억

by 양다경

"너 이거 먹어봤냐?" 집에 사는 경필이 내게 물었다. 나는 노랗고 긴 것이 먹는 거라는 건 알겠지만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이건, 바나나라는 거야!" 경필은 노랗게 생긴 길쭉한 모양의 껍질을 쭈욱 벗겨냈다. 그리고 눈동자를 떼구르 굴리며 바나나를 입으로 가져가 맛있게도 먹었다. "이거 비싼 과일이야!"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말을 건네는 경필. "어떡하냐? 나 그런 거 안 좋아해" "뭐?" 경필은 믿을 수 없다며, 세상 불편한 얼굴을 했다. "너 이상한 애구나?" 경필은 보란 듯이 빈정거렸다. "기가 막히네, 그 딴 걸 자랑이라고 들고 온 네가 이상하지!" 나도 경필의 빈정을 맞받아쳤다. "나는 집에 이런 거 많아!" 들고 있는 바나나를 경필은 보란 듯이 내게 쭈욱 내민다. "그래, 많이 먹고 배탈 나라~" 실쭉 꺼리며 나는 경필을 놀렸다. "까불래, 나는 여자라고 안 봐줘!" 하고 경필은 큰 소리로 나를 다그친다. "어쭈구리, 나는 남자라고 안 봐줘~!" 손을 들어 옆구리로 가져갔다. 경필은 움찔하더니 대화가 죽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경필은 자신의 규칙대로 되지 않는 대화의 흐름이고, 내가 대화의 키를 잡은 것에 당황했다. "칫" 하며 자신의 집골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경필. 나도 돌아서는 경필의 뒷모습에 괜히 나왔다는 생각에 휙,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후, 골목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 또 경필을 보게 되었고, 경필의 자랑은 계속되었다. "똘이장군이라는 영화 봤냐?" "똘이장군?" 눈을 깜박이며 나는 못 푸는 숙제를 보듯 경필을 쳐다봤다. "그거 재밌대, 애들한테 인기야!" 경필은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꽤 많은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경필의 돈을 보고도 크게 감흥 없이 내 주머니 속 동전을 달그락거렸다. "돈 자랑이냐, 나 돈 있어?" 질세라 나는 손 위에 만지작거린 10원짜리 동전을 펼쳤다. 경필은 내 동전에 하찮은 표정을 지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돈 더 많아, 시민회관 가서 똘이장군 영화 보여줄까?" 그 말에 흠칫 놀라는 나, 그 모습을 흘겨보는 경필은 "일요일 오전에 너의 집 앞에 있을게" 하며 입에 침을 바르고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 경필의 말에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별일 없으면, 뭐" 끝까지 긍정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나, 나는 어느새 일요일이 되니 옷을 그럭저럭 챙겨 입고 경필이 오면 나갈 준비를 했다. "어디 가?" 집에서 파자마를 입은 채 널브러져 있던 오빠는 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경필이가 영화 보여준다는데?" 오빠의 눈빛은 갑자기 희망으로 동요했다."그래? 나도 같이, 나도!" 오빠는 작동음처럼 "좋아! 좋았어!"를 연발 외치더니 서둘러 일어나 나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셋은 집 문 앞에서 만나 '똘이장군'을 보러 시민회관으로 향했고, 가니 정말 영화가 인기가 많아 북적대는 줄을 섰다. 그리고 들어가서 만화 영화를 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을 또 학습하는 듯도 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은 남북으로 갈린 아픈 현실이 있다는 걸. 거기다 북에서 땅굴을 파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만화지만 현실 같아,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극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공산당은 숙적이라는 명제를 남기고. "공산당을 때려잡고 나라를 지킬 거야!!" 경필은 불타는 애국심 품은 말을 하더니 그 뒤로 맥락 없이 롤라장으로 우릴 인도했다. 처음 타는 롤라에 수십 번을 자빠지고, 엉치뼈가 아플 정도로 나는 엉덩방아를 찧어댔다. 경필과 오빠는 나와 다르게 특유의 리듬감을 해소하며 잘도 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롤라장의 음악이 뚝 끊기고, 재정비를 할 타임이었다. 그때 롤라에 허우적대는 나를 보고 낄낄대는 경필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화가 나서 당장 달려가 경필의 등짝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롤라 타는 것이 한숨이 나오는 실력이었으니 쫓아가서 때릴 순 없었다. 경필은 그런 나를 보고 또 배꼽이 빠질 듯이 허리를 구부리며 웃어댔다. 웃어대다 또 음악이 나오면 경필은 롤라를 회전하며 뒤로 갈지자로 타곤 한다. 그런 경필을 보며 나는 삐걱대며 따라 타고, 그렇게 우린 롤라 대회라도 나갈 것처럼 그곳에서 꽤 많은 돈을 썼다. 그 돈은 다 경필의 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사를 누린 오빠는 집에 오는 길에 경필과 둘이서 몸싸움을 했다. 그 이유는 땅에 떨어진 돈이 '내 거야! 네 거야!' 하는 문제로,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어린 치기였던 것 같은데 경필의 호주머니에서 '툭' 떨어진 돈이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경필의 편을 들어줄 생각도 없이 '싸우든가 말든가'하며 무심결에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경필은 오빠랑 싸우는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어김없이 나를 불렀고, 셋이서 제법 놀러 다니는 일이 빈번했다. 경필의 집은 세 가구 정도의 다가구였고, 우리 집 바로 뒤편이었는데, 집 안방의 높고 작은 창문으로 올려다보면 경필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계단으로 올라갈 때 우리 집 작은 창문으로 속삭이듯 '똘이장군 2탄 나왔다'는 말로, 또 보러 가자고 나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 대문 닫는 소리에 경필은 후다딕 계단을 올라가 자기 집 현관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경필의 집은 종종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경필이네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어머님이 집사로 있었기에 목회 차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간혹 울려 퍼지기도 했고, 저마다 사람들은 계단을 내려오며 친분을 과시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같이 경필의 집 안이 사람들로 북적대는가, 싶은 어느 날. 우르르 사람들이 연이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층계는 곡선을 그리듯 약간 휘어진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몇몇 사람들은 경필이네를 기다리는 듯도 했다. '치익' 타들어가는 담배, 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에 애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알고 보니 경필의 집에 빚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고, 그래서 집은 그 빚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해 집이 포위되어 어수선했던 것이다. 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마주치는 경필이에게 물어볼 수 있었지만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일이 있고 몇 달 후, 결국 경필의 가족은 갑자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집을 내놓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알고 경필이의 집을 협의 끝에 싸게 매입했는데, 아무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은 경필의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들은 얘기론 경필이가 우리에게 썼던 돈은 알고 보니 부모님 서랍에 넣어둔 돈이었는데 경필이 몰래 가져온 돈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경필이 이사를 가기 전, 마지막으로 계단에 올라가다 우리 집 안방 창문으로 나를 불렀던 기억이 났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나나를 넘겨주며. "잘 있어!" 한마디를 건넸던 경필. 그리고 "똘이장군 계속 시리즈로 나온대!" 하며 말을 덧붙이고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던 경필.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의 머쓱한 낯빛은 어두웠으며 눈언저리가 멍든 것처럼 파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사정을 다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던 탓에 경필이 어떠한 이유로 집이 어려워져 이사를 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게 선의를 베풀던 아이에게 난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도,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고구마를 백 개 먹은 친구였을까, 이유가 어찌 됐건 경필이 내게 베풀고 만들어준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은 고스란히 남아 달콤한 우정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와 같이 중년이 되었을 경필."고마워. 영화를 보여준 것도 롤라장에 데려다준 것도 그리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바나나를 내게 준 것도. 너희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빌게" 하고 축복을 빌어주면 "오, 양 씨 뭐야? 억지스러워! 잘못 먹었냐? 어디 아프냐?" 할 것 같은 경필. 그래서 옛 친구란 츤데레 같은 무지갯빛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한없이 순수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다가와, 내 곁에 아련히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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