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G TEA
____
카페인에 약한 나
대부분의 큰 딸들이 그러하듯 나도 우리 아빠를 많이 닮았다. 외모적으로도 많이 닮았지만(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닮아가고 있어서 심난할 정도다.) 성격적으로나 체질적으로도 닮은 부분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카페인에 약하다는 점이다. 아빠는 예전부터 오후 3시가 넘어가면 커피를 드시지 않았다. 오후 3시 이후에 마시는 커피는 항상 잠을 못 자게 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심리적인 문제라며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니 나 또한 오후 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차를 마시면 괜찮다는 것이다. 차는 언제 마셔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으로 인해 잠을 못 자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차는 많이 마셔도 속이 쓰리다거나, 거북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더 편안해진달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난 차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지금도 회사 책상의 서랍 속에는 8가지 종류의 차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전에 한잔, 오후에 두 잔 정도의 차를 즐긴다.
그렇다고 차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다. 차를 다기에 우려내고, 향을 음미하며, 명상을 즐기듯 차를 마시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주로 물을 마시듯 커다란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티백을 하나씩 넣어서 수시로 마신다. 향기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얼그레이 혹은 루이보스 한잔, 점심을 과하게 먹었거나 속이 답답하다 싶을 땐 페퍼민트 한잔, 몸 컨디션이 안 좋거나 피곤하다 싶을 땐 카모마일 혹은 레몬 진저 한잔, 시원 상큼함이 필요할 땐 아이스 그린 민트 티가 나만의 티 테라피이다.
그래도 정말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명상하는 기분으로 좋은 차를 마시고 싶을 땐 TWG Tea의 Jasmine Queen Tea를 마신다.
____
내가 알고 있던 럭셔리 티 브랜드 TWG Tea
어떻게 TWG Tea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잡지나 여행을 하다 알게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브랜드는 어느 순간 훅하고 내 머릿속에 럭셔리 차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통은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선호한 뒤에 탐색을 하고 구매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지게 되는데, 이 브랜드는 인지와 선호, 탐색과 구매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아마도 정성 들여 만든 것 같은 패키지와 면으로 된 티백 주머니, 차들로 가득 차 있는 매장의 분위기들이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차의 퀄리티와 맛 또한 수준급이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패키지에 적혀 있는 '1837'이라는 연도였다. 고등학교 때 배운 얄팍한 세계사 지식으로 인하여 '유럽은 차를 많이 마신다 - 차를 동양에서부터 수입해갔다 - 수입을 하는 중간 채널이 싱가포르, 인도였다.'라는 나만의 공식이 머릿속에 그려졌었고, TWG 패키지에 적혀 있는 '1837'이라는 그 숫자는 당연히 TWG Tea의 설립 연도라고 생각을 했었다. 여기에 옛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매장 인테리어까지 더해져서 난 TWG Tea가 150년이 훨씬 넘은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티 브랜드라고 믿게 되었다.
____
TWG Tea의 배신
하지만 TWG Tea 브랜드는 2008년에(이제 고작 10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철저한 럭셔리 마케팅 전략으로 만들어진 티 브랜드라고 한다. 게다가 뭔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았던 TWG라는 이름 또한 'The Wellbeing Group'의 약자라고 하니 그동안 내가 믿고 있었던 게 무엇이었던 건가 싶어서 한 동안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TWG Tea는 모로칸 출신의 Taha Bouqdib와 Maranda Barnes, Rith Aum-Stievenard가 2008년 싱가포르에서 공동 창업을 한 브랜드라고 한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향수 업계에서 일을 해왔던 Taha Bouqdib이 좋은 차에 대한 높은 관심이 있었고, 전 세계의 좋은 차를 찾아다니다 보니 그 열정이 TWG Tea라는 브랜드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TWG는 이름(The Wellbeing Group)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차를 처음부터 생각한 브랜드는 아니었다고 한다. 럭셔리 콘셉트로 스파와 스킨케어 제품을 판매하던 브랜드였지만, 2008년부터 시작한 Tea 브랜드가 대 성공을 이루고 나자 차 사업에만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는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일본, 홍콩, 두바이,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에 TWG 매장을 운영하고 있고, 뉴욕의 'Dean & Deluca' 매장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 만든 첫 번째 명품 브랜드라고 불릴 정도라고 하니, 이 정도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드라마틱한 성공 신화를 써온 브랜드라고 할 수 있겠다.
____
'1837'의 비밀
TWG Tea의 엄청난 성공을 이끈 것은 철저한 럭셔리 마케팅이다. 럭셔리 마케팅은 무조건 비싸게만 보인다고 되는 마케팅은 아닌 것 같다.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철학이 명확해야 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37'이라는 싱가포르의 기념비적인 해를 일종의 브랜드 헤리티지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건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 까 싶다.
사실 TWG Tea와 1837년의 해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생각된다. 1837년은 싱가포르의 국제 상업 회의소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가 설립된 해이며, 이 기관의 역할은 차와 향신료 등을 독점으로 거래하던 동인도회사로부터 싱가포르에서 거래하는 사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기관을 통해 싱가포르의 차 사업이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니 싱가포르의 차 사업에는 매우 의미 있는 숫자이지만, TWG Tea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연도인 것이다. 그들이 럭셔리 마케팅에 얼마나 전문가들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을 마치 자신들의 정체성과 헤리티지의 근간인 듯 활용을 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패키지들과 로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니 'Since' 혹은 'Established'와 같은 단어가 붙어 있지 않았다. TWG 홈페이지 내에서도 브랜드의 역사에 대한 내용 또한 찾아볼 수가 없었다.
____
럭셔리의 완성은 디테일함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체화시키는 요소들이 많이 있겠지만, 특히나 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것들은 어찌 보면 참 소소한 것들(하지만 디테일한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것들)인 것 같다. TWG Tea는 그런 점에서 디테일한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아마도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처음부터 빡! 이건 럭셔리 브랜드!라고 박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가장 크게 인상받았던 것은 티백 주머니였다. 일반적인 부직포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면으로 만든 면 주머니였다. 티를 우릴 때면 자연스럽게 뜨거운 물에 티백 주머니를 담가두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난 항상 그 부분이 찝찝했었다. 그러다보니 면 티백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면서 진짜 차를 제대로 우려 마시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브랜드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또 하나는 매장이다. 일단 매장의 위치 자체가 럭셔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 국내 같은 경우엔 청담동에 위치해 있고, 싱가포르도 명품 거리나 명품 브랜드들이 집중해 있는 몰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럭셔리한 곳에 자리를 잡은 매장(혹은 살롱)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주석으로 만들어진 겨자색 차통과 나무 보관장의 규모에 압도를 당하게 된다. 옛날 차 무역이 활발해질 때부터 차 보관용으로 개발되어서 지금까지 사용되는 전통적인 차통이라고 하는데, 디자인적으로도 이쁘지만 그 크기와 다양함에 놀라게 되는 것 같다. 이와 함께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꾸며진 실내 분위기와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철저하게 교육받은 직원들의 모습은 이 브랜드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매장에선 다양한 음식도 함께 판매가 된다. 싱가포르 출장 때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차가 담겨 있는 티팟에서부터 메뉴판, 그릇, 음식들까지 어느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좋은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____
더운 여름엔 아이스 티
럭셔리한 이미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헤리티지를 만들어낸 브랜드라는 것에 솔직히 배신감을 많이 느꼈지만, 브랜드의 핵심인 '차'의 퀄리티를 가장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특히 요즘 같이 더운 날엔 중국 녹차와 민트, 약간의 시트러스 향까지 더해진 Iced Caravan Tea에 저절로 손이 가곤한다. 한 여름의 꿉꿉함을 날려버릴 만큼 상쾌하고 깨끗한 녹차의 맛을 가지고 있는 이 아이스 티는 맛도 물론 좋지만,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패키지 때문에 더더욱 이 브랜드를 멀리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TWG Tea의 아이스티는 일반 머그잔이 아니라, 커다란 유리병에 잔뜩 우려내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다. 따뜻하게 티팟에 우려먹는 다른 차들이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혼자 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면, 아이스티는 이 무더운 여름날 친한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아이스티를 한 잔 씩 마시면서 이야기하기 할 수 있는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이렇게 마시는 순간까지 고려하여 디자인된 브랜드라면 정말 그들의 디테일은 어디까지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