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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aki Nov 08. 2022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핀카 바카라_Time waits for no one


사실은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털어내기 위해 시작된 번개 모임이었다. 일에 대한 프로세스도 그에 대한 대응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면 일단 기분이라도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직장인들의 삶이라는 게 스트레스받고, 술 마시며 풀고, 다시 또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반복의 일상들이니까.


그런데 이 날은 좀 달랐다. 부정적인 일상과 생산적인 미래가 하나로 뭉쳐져 시너지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며칠 전부터 생각해본 나의 플랜 B에 대한 이야기가 슬며시 나왔고, 언제나 리액션이 좋은 그녀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나의 생각에 또 다른 아이디어들을 마구 얹어준다.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사실 이를 이해해보려 한다거나, 해결해보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가 에너지가 되어 좀 더 생산적인 나의 플랜 B의 에너지가 되어 간다.


그래. 한번 해볼까?


원래의 나라면 일단 시장 조사를 했을 것이다.

요즘 이런 것들이 있고 이런 게 유행이고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하고 한참을 이것저것 슬쩍슬쩍 살 펴면 보다가 ‘아. 내 생각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구나. 이렇게까지 하려면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느니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부정적이고, 암울한 결과를 생각하며 성공과 실패를 저울질하다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요즘 성공한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변경도 하고, 더 좋은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그런 방식 자체가 나에게 그렇게 익숙한 방법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보니 정말 그렇게 해볼까 싶다….라고 쓰고는 있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귀차니즘과 불안들을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과제가 아직 남아 있다.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를 넘나들며 오늘의 와인을 연다.

오늘의 와인은 스페인 후미야 지역의 핀카 바카라(Finca Bacara) Time Waits for No One (Black Label) 2018이다.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니… 어쩜 이렇게 오늘의 대화 주제와도 잘 맞을까 싶지만 딱히 대화 주제에 맞는 와인을 골랐다기보다는 이 와이너리의 모나스트렐 품종의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다.


이전 핀카 바카라 YEYA를 마시면서 썼던 <케케묵은 기분을 털어놓게 하는 와인>에 썼던 것처럼 스페인 후미야 지역은 모나스트렐이라는 토착 품종을 가지고 있고, 핀카 바카라는 이 토착 품종에 진심을 다하는 와이너리였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레드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다.


첫 향은 일반 레드에서 느낄 수 있는 풍부한 붉은 과실이 풍긴다.

레드를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고, 아직은 이 섬세하고 깊은 맛을 잘 모르다 보니 잘 마시는 편은 아닌데 뭔가 알싸하고, 톡쏘게 올라오는 뒷맛이 다른 레드에서는 느끼기 힘든 뉘앙스가 있다. 덜 익은 체리의 맛과 함께 후추의 스파이시함이 올라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레드 와인이구나 싶은 정도의 맛이었다. (감초향이 난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감초가 어떤 향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시간이 지나기 시작하니까 맛과 향이 변한다.

한참 대화를 하다가 한 모금 마시니, 톡 쏘기만 했던 신맛이 부드럽게 풀리면서 초콜릿, 약간의 크림과 바닐라 향이 난다. 오호 신기하다. 함께 마시던 그녀도 맛의 변화에 놀라워한다. 이젠 시간이 지나가는 게 기다려진다. 조금 뒤에는 또 어떤 맛들이 나올 수 있을까. 3시간 남짓 마신 시간 동안 이 와인은 신 체리와 후추의 맛에서 초콜릿, 크림, 바닐라를 지나 플로럴 향을 풍기며 깊은 단 맛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이 사람은 기다려주지 않지만 와인은 기다려주나 보다. 어디에선가 와인 한 병을 30분 만에 다 마셔버린다면 그 와인을 제대로 마신 게 아니라고 하던데 그동안 우리는 와인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것 같다.


—-

와이너리 : Finca Bacara


지역 : Spain, Jumilla


품종 : Monastrell 100%


도수 : 14%


바디감 : 미디엄 바디


당도 : 드라이


—-

Time Waits for No One. 와인 메이커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짧은 순간들을 즐기고, 그 시간들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라는 걸까? 다시 한번 나의 플랜 B는 그냥 하면 되는 것이고, 무의미하게 나의 시간을 흘려버리지 말아야겠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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