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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민 Oct 14. 2022

초록을 거머쥔 우리는

#8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 달아나는 빛 초록을 거머쥐고 

그 많은 내 모습 기억되리."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글로, 혹은 영상으로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는 건 사진이라며 열심히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방법 말고도 요즘에는 다양한 감각을 이용해서 여행의 시간을 꺼내오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은 듯하다. 대개로 여행지에서 주로 들었던 노래로 기억을 떠올리거나 여행지마다 향수를 정해 같은 향수 향을 맡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나는 여행지마다 새로운 바디 스프레이를 가지고 가서 향으로 여행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후각을 이용한 방법은 무리였다.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기 위해 저마다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를 내놓는 이곳에서 실용성 없이 무거운 액체인 향수나 바디 스프레이는 사치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었다. 덕분인지 이번에는 향수 대신 노래가 나의 여행을 감싸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이곳에서 음악은 의미가 깊다.


 쿠바의 기억은 '청포도향'으로, 캘리포니아의 기억은 '시트러스향'으로부터 소환된다.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순례길의 기억을 불러오는지 묻는다면 나는 단연히 잔나비의 소곡집Ⅱ '초록을거머쥔우리는' 앨범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앨범은 순례길을 걷는 중에 정말 많이 들어서 과장을 보태자면 순례길의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문득 나의 모든 시야는 초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초반에는 산과 풀숲이 많은 지형을 걷게 되는터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숙소에서 쉴 때도, 초록은 항상 내 시야 안에 있었다. 잔나비가 말하는 '초록'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정의하는 이곳에서의 '초록'은 어디서든 나와 함께 있는 대상이었다.



잔나비 소곡집Ⅱ : 초록을거머쥔우리는





  불편한 숙소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아 새벽에 깼다. 도착한 마을이 생각보다 작았고 알베르게가 많지 않아 공립 알베르게에 묵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저렴한 대신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시설은 좋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 8-10유로 정도 되는 가격으로 하룻밤을 잘 수 있어 합리적인 가격에는 틀림없다.) 나는 자는 데 있어 크게 예민한 편이 아니라 숙소를 따지지는 않았지만 이번 알베르게 운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 방을 썼던 사람들의 코골이는 귀마개를 끼고 잠들어도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위력이었다. 다인원이 함께 자는 것이 일상인 이 순례길에서 코골이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걸은지 얼마 되지 않은 초반이라 그런지 잠을 적잖이 설쳤다. 해가 뜨는 시간은 보통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지만 4시에 눈이 떠져버렸다. 눈을 다시 붙일지 말지 고민하던 중에 뱃고동 같은 소리가 또 한 번 들리자 금세 생각을 바꿔 걸을 채비를 했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앞은 캄캄했다. 처음으로 랜턴을 꺼내 어두운 밤길 속에서 화살표에 의지하며 걷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해는 항상 뒤쪽에서 떴다. 프랑스 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는 길이라 해가 뜨기 전, 이른 시간에 출발하면 걷는 중에 해가 항상 등 뒤에서 뜨고 있었다. 일출의 순간은 걸으면서 뒤를 힐끔힐끔 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날도 해가 머리를 들 때쯤 뒤를 돌아보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여왕의 다리가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야는 밝아져 갔다.

 워낙 빨리 나온 탓인지 혼자 산길을 걷고 있으니 주위가 온통 고요했다. 사람 소리는커녕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으면 다양한 생각의 나래에 빠지기 쉽다. 거기다 해가 뜨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이 살짝 몰려왔다. 이렇게 잡념이 많아지고 힘이 빠질 때는 노래를 크게 틀고 양손으로 가방끈을 꽉 잡은 채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가는 것이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온 우주에서 나와 이 길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걸을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만 집중이 되고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지고 피곤이 사라진 채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정상에 다다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가고 있었다. 정상에 멈춘 뒤 걸어온 길을 보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쌍무지개와 마주쳤다. 


2022.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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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봐 손을 흔들잖아, 슬픔이여 안녕"

 뒤돌아 무지개와 마주쳤을 때 귀에서 흘러나왔던 노래 가사다. (잔나비-슬픔이여 안녕)


 나는 아빠와 함께 걷는다는 생각으로 이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의구심이 있었다. 옆에 함께 걷고 있는 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아빠랑 같이 걷는다는 말인지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믿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하지만 무지개를 마주치고 나서야 나의 불신은 사라졌다. 가끔 순례길을 걷다 보면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을 마주치기도 한다. 바로 이때처럼 말이다. 내가 무지개와 마주쳤을 때 이런 노래 가사가 나온 게 우연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신기한 순간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정의한 이 날의 무지개는 내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고 말하는 아빠의 응원이면서 동시에 함께 걷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아빠의 대답이다.


 나는 예상보다 빨리 이곳에서 초록을 거머쥘 수 있었다. 앞서 '어디서든 나와 함께 있는 존재'라고 정의 내린 나의 초록은 아빠였다. 그 초록은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언제 나에게 대답할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초록은 어디에나 있고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초록을 거뭐진 채로 여름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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