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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민 Oct 18. 2022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길

#9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로그로뇨)

 산티아고를 오기 전, '라바날 데 까미노'의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있으셨던 한국인 신부님이 10년 전 다녔던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라고 생각해 연락을 드렸고 운이 좋게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만나 뵐 수 있었다. 신부님께서 말해주신 이 길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져야 하는 길'이었다. 걸으며 수많은 순례자들을 만나고 헤어질 테니 이 과정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당부를 하셨다. 특히 헤어짐에 무던해져야 한다는 것에 무게를 두셨는데 당신께서 만나고 보았던 수많은 순례자들이 힘들어할 때는 주로 헤어짐을 두려워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헤어짐이 두려워 스스로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고 하셨다. 


 만남이 어려운 사람이 간혹 있다. 어렵다기보다는 신중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만나면 금세 친해지고 친구들을 넓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낯을 가리는 편이긴 하지만 사람들을 좋아하고 웬만해서는 그들의 좋은 점만을 보려 했고 또 그 점들을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만남은 나에게 늘 익숙한 것이었지만 헤어지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힘들었고 내가 그랬듯이 나도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점들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안다.






 로그로뇨까지 걸어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손녀처럼 늘 챙겨주신 스페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INFJ라며 공감 능력이 뛰어났던 미국인 친구, 뭐든지 하는 일이 잘 될 것 같다며 칭찬해주신 한국인 아주머니, 모두를 나열할 순 없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로그로뇨에 도착해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인 분과 같은 숙소에서 만났는데 시에스타가 지나고 함께 타파스 바를 정복하러 떠났다. (로그로뇨는 타파스 바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던 중 새로운 동행을 만났다. 길에서 여러 번 마주쳤던 한국인 분이셨다. 두 분도 이미 구면 같았고 나도 구면이었어서 함께 스페인의 타파스를 즐겼고 커피와 유럽의 주홍빛 거리를 즐겼다. 타파스 바를 옮겨 다니며 마주쳤던 순례자들을 많이 만났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내가 쌓아놓은 인연들로 가득한 이곳, 새로운 사람들마저 완벽했던 이곳에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무를 생각은 없었지만 몇몇 순례자들의 제안에 하루를 더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2022. 06. 05 로그로뇨의 밤


 다음 날에 생각해놓은 일이 있었다.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조식을 먹은 뒤 전 날 알려주신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보거나 여차하면 빌바오로 가서 구겐하임 미술관과 가스텔루가체를 다녀오는 거였다. 그러고 난 뒤 저녁에는 타파스 바에서 타파스를 한 번 더 즐길 예정이었다. 그동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우연히 만날 것 같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팜플로나에서 요가강사를 만났던 것처럼 우연적인, 행복한 일들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다음 날, 내가 생각했던 영화를 볼 수 있던 플랫폼은 스페인에서 이용할 수 없었고 빌바오의 가스텔루가체 입장권은 이미 매진되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휴관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타파스 바들이 월요일에 휴점을 했었고 함께 만나서 맥주를 먹기로 했던 순례자 언니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모든 일정이 무너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늦지 않았다'는 출발한 친구의 답장을 보고 나서 갈지 말지 고민하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출발하려는 다른 순례자와 얘기하다가 어쩌다 보니 함께 다음 마을까지는 걷고 있었다. 늦게 출발한지라 사람이 아무도 없어 둘이서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면서 같이 걸었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고 잠깐 쉰 뒤, 다음 마을로 갈지, 쉴지를 정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일단은 멈추었고 함께 걸었던 친구는 다음 목적지로 먼저 떠났다. 작디작은 마을에서 혼자 남은 나는 일단 숙소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외로운 나는 외로운 마을에 있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다시 익숙한 로그로뇨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선택을 번복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익숙해서 다시 찾아온 로그로뇨는 낯설었다. 공립 알베르게에는 모두가 처음 보는 순례자들이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헤어짐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이곳에서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했었나. 그 말이 맞았다. 이곳은 헤어짐에 익숙해야 하는 길이지만 그때 그 순간의 나는 헤어짐이 어려웠다. 함께 있는 사람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길인 것을 알지만 지금까지 만나고 친해진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한 경험이 그리워지고 외로운 감정을 만들어버렸다.


 흐려진 판단력을 다시 잡아보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이전 나는 혼자인 적이 더 많았지만 헤어짐이 이렇게 두렵지 않았다. 혼자인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임에 자유롭고 혼자 걸음에 생각 정리를 할 수 있었고 어딘가에 속해있기 않기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나는 늘 새로움에 가득 찼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이 길이 익숙해지면서 형체 없는 관계에 소속되고 싶어 하고 집착하고 타인에게 영향을 받은 선택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외롭다. 오직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기약할 수 없는 우연과 상대방의 결정에 나를 맡기려 해서 외롭다.  모두를 잃고 싶지 않고자 하는데 상대방도 같기를 원해서 외롭다. 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면 외롭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워하는 중에도 새로운 사람들을 또 만났다. 앞으로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함께 도착하는 언니도 만났고, 슬퍼하고 있을 때 나에게 울지 말라며 위로해준 알베르게 주인도 만났다.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헤어진다는 것이 슬픈 감정인 것은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헤어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다가올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야 왜 신부님께서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져야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세상에 내어주면 세상은 나를 위해 무언가를 다시 쥐어줄 것이다. 헤어짐에 연연하면 새로운 인연을 놓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한 문장을 더 기억했으면 한다.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언제나 새로운 세상은 열려있다. 휩쓸리지 않는 나를 가지면 헤어짐이 조금은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익숙한 관계에 속아 나 자신을 먼저 잃지 않아야 한다. 



2022. 06. 06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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